아까부터 누가 줄곧 꼬나보는 것 같이 찜찜하게 이마가 스멀거려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침내 맞은편에 앉은 어떤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엉뚱하게도 여남은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남자아이였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이가 걸으면서도 내 눈을 계속 쏘아보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었던지, 어쨌든지 간에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찻간 천장에 장치된 전광판에는 다음 역이 수유역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아저씨!”
---「밀레니엄 축제」중에서
민선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한다. 민선이의 울음소리가 차츰 리듬을 타면서 나는 또 어떤 화끈한 장면이 떠오르며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곤 하지만, 오늘은 아내가 외출을 했으므로 어쩔 수가 없다. 다섯 살이라는 민선이가 우리 대문 문턱에 앉아 저렇게 우는 지가 열흘이 넘었을 것이다. 민선이가 집을 나와서 우는 것은 매일이 아니라 하루나 이틀 걸러인데, 꼭 이맘때인 열한 시 경이다. 그러니까 민선이의 울음소리를 나는 오늘로써 다섯 번인가 듣는 셈이다.
---「민선이」중에서
오늘 세 아이들에게서 잠시지만 참 많은 것을 알고 깨달았다. 다문화가정!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중국,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 나라에서 시골의 노총각들이나 중소공장의 근로자들이 신붓감을 돈을 주고 데려온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특히 베트남 여자가 많아 6천5백여 쌍이 국제결혼을 했다는데, 거기에 브로커들이 끼어들어 사기를 친다는 말도 들었다. 그야말로 벼룩이 간을 내먹을 인간들이다. 그중에서도 저 세 아이들의 부모는 성공적으로 정착한 가정이다. 물론 그런 가정도 많겠지만 실패 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언론 보도로 알고 있다. 그 2세들인 저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과 동화되기까지는 적잖은 세월이 흘러야 하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우리 집에 오는 천사들」중에서
오전 10시경에 우리 병원에 온 보람이는 하루 종일 울었다. 열이 40도가 넘을 때도 있었고, 39도로 떨어지기도 하지만 고열이 계속되었다. 울다 지쳐 가릉거릴 때 젖병을 물리면 잠시 빨다가 잠이 들곤 하지만 잠도 길어야 20분이었고 깨어나면 울었다. 잠결에도 계속 얼굴을 찡그리는 것으로 보아 어디가 몹시 아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밤에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밤에도 30분 이상 잠들이 못하다고 했다. 보기 드문 예쁜 얼굴인 엄마는 이제 몸도 마음도 지쳐 피부가 까칠하고 몸을 가누기 힘들어했다. 아기도 엄마도 보기에 안타까워 나는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불명열不明熱」중에서
그렇다고 혜수가 거저 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큰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온갖 신선한 무공해 야채며 과일을 손수 차로 실어다 주었고, 보람이네 식구가 먹는 쌀과 잡곡도 떨어지지 않게 공급해 주었다. 그것이 혜수 때문만이 아니라, 동생 가족을 사랑하는 큰아버지의 정이며 형제간의 우애라는 것을 보람이는 깨달았다. 보람이는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눈앞을 부옇게 가렸던 안개가 활짝 걷히는 느낌이었다. 온갖 못된 생각을 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자신도 모르게 행동하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자신만을 위한,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한 턱없는 욕심이었음을 깨달았다.
---「보람이네 집」중에서
재륜이가 냉장고에서 깍두기를 대접에 수북하게 담아왔다. 손자는 나를 닮아 깍두기를 잘 먹는다. 아들이 운영하는 설렁탕과 소머리국밥 전문식당은 깍두기가 필수 반찬이다. 그러므로 우리 집은 깍두기가 떨어지지 않는다. 깍두기를 본 나용수가 좋다고 손뼉을 치며 오두방정을 떨고는 맨입에 깍두기를 정신없이 집어다 먹었다. 엄마가 베트남 여자인데, 깍두기를 잘 먹는 영수가 신기해서 지켜보았다. 한데 녀석은 깍두기를 뒤적거리며 반듯하게 네모진 것만 골라 먹고 있었다. 재륜이도 녀석을 잠시 보다가 후다닥 네모진 깍두기 세 개를 골라 자장면 그릇에 얹었다. 녀석도 덩달아 깍두기를 뒤적거리며 네모진 것 세 개를 골라 담고는 서로 바라보며 깔깔대고 웃었다. 여자아이들은 멋모르고 덩달아 웃는데, 나는 정신이 멍해져서 깍두기를 다투는 두 아이를 바라보았다.
---「사랑을 읽는 시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