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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비로소이다 (큰글자책)

나는 노비로소이다 (큰글자책)

너머의 역사책-0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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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48쪽 | 188*257*20mm
ISBN13 9788976965769
ISBN10 897696576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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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586년 음력 3월 13일, 전라도 나주(羅州) 고을 관아의 뜰에서 벌어지는 소송이다. 당사자들 가운데 중년의 남자는 원고로서 이지도(李止道), 피고는 다물사리(多勿沙里). 지금의 기준에서 엄밀히 보자면 이 두 사람은 모두 당사자가 아니다. 이지도는 어머니 서(徐)씨를 대리하여 소송하고 있으며, 다투고 있는 것도 다물사리의 딸인 인이(仁伊)의 신분이다. 따라서 두 사람은 소송대리인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지도는 서씨의 상속인이이고 다물사리는 인이의 어머니인 만큼 소송의 결과가 자신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관계여서 당사자와 다름없는 지경이다. 당시에는 이런 경우에도 원고와 피고로서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다물사리의 입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말이 나왔다. “저는 양인이 아니라 노비이옵니다.” 말을 잘못 했거니 싶었는데, 상대방인 이지도도 또한 “아니옵니다. 다물사리는 노비가 아니라 양인입니다.” 하고 다투는 것이 아닌가. 당시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소송에서는 자기는 노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서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송사는 좀 특별한 소송이 되겠다는 느낌이 밀려온다.
조선의 신분제도에 관하여 여러 이야기들이 있지만, 대체로 양천제(良賤制)라고 하는 질서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양인이나 천인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며,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그 신분으로 살다가 죽는다. 뿐만 아니라 그 신분은 자손에게 대물림된다. 양인을 자유민이라 한다면 천인은 노예이다. 천민은 노비라 불렸으니, 노비란 용어는 사내종인 노(奴)와 계집종인 비(婢)를 합쳐 이루어진 낱말이다. 노비는 재물처럼 취급되기도 하고 형법상의 보호도 양인보다 덜 받는 질곡 속의 존재이다.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노비이기보다는 양인이고자 할 것이다. 실제로 노비들 가운데에는 갖은 방법을 써서 양인으로 행세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신분관계 소송에서는 자신을 양인이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러 의문이 일어날 만하다. 우선 왜 다물사리는 스스로를 노비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소송이 진행되면서 그 연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조선시대의 신분제도가 빚어내는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다물사리와 이지도는 그 해 4월 3일까지 주장과 증거 제출을 마쳤다. 법 적용의 문제보다는 사실관계의 확인만이 중요하게 다투어지는 사안이었다. 그리고 4월 19일에 판결이 내려졌다. 이것만 놓고 보면, 법정에 나온 지 한 달 남짓에 소송이 끝났으니 매우 빠른 진행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과 비교하면 초고속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420년 전 전라도 한 귀퉁이에 있는 고을에서 일어난 소송에 대해서 위와 같이 자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일까. 앞으로 이지도와 다물사리 사이의 소송이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그런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 pp. 22~24, 「법정의 모습 --- 선조 19년 나주 관아」 중에서


현재의 판결문은 크게 주문과 판결이유로 이루어진다. 주문은 청구에 대한 최종 결론이고, 사실관계는 판결이유에서 나타난다. 우리 법원은 이제까지 사건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판결서에 판결이유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의 범위를 확장해 왔고, 판결이유에서 사실관계를 생략할 수 있는 입법을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판결문은 외국의 것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며, 판결문만 봐서는 도대체 어떠한 사실관계에 법적용을 한 것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도 더러 있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의 판결문은 그 안에 당사자의 주장, 제출된 증거가 모두 날짜별로 수록된다. 지금의 시각에서 말하자면, 조서와 증거까지 판결문에 다 기재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재된다.

① 판결서를 발급한 날짜와 관청 이름
② 소장(訴狀)의 내용
③ 시송다짐(양 당사자의 소송 개시 합의)
④ 원고와 피고의 최초 진술
⑤ 이후 당사자들의 사실 주장과 제출된 증거
⑥ 결송다짐(양 당사자의 변론 종결의 확인과 판결 신청)
⑦ 판결

이처럼 판결문을 통해 소송의 진행 상황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조선시대 민사소송의 한 특징이다. 재판의 진행 과정을 나타냄으로써 한쪽 당사자의 논거가 박약해지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뿐 아니라,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도 알 수 있어 판결의 정당성과 공정성이 확보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판결이 적정했는지를 상급기관에서 그 문서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재판의 전 과정이 판결문에 기록되는 관행을 낳았으리라 여겨진다. 재판의 전 과정을 기록하는 만큼, 증거가 많이 제출되는 사건인 경우?는 판결문의 분량 또한 방대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판결서들은 빠른 필기체인 초서(草書)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판결서들이 결송입안(決訟立案)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 법률행위에 대하여 관청에서 증명해 주는 제도로서 ‘입안’(立案)이 있었다. 토지·건물·노비의 매매나 양도, 양자(養子) 따위가 있을 때, 당사자가 그 증명을 신청하게 되면 관청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인증하여 발급해 주는 문서가 입안이다. 예를 들어 두 사람 사이에 토지의 매매가 이루어진 경우, 매수인이 그때까지의 매매계약서와 함께 소지(所志)라고 하는 신청서를 담당관청에 제출하면, 담당관청은 매도인, 증인, 계약서의 작성인[필집(筆執)이라 부름], 그 밖의 관계자를 불러 진술을 받고 사실을 확인하여 증명서인 입안을 발급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입안에도 신청서, 관계자들의 진술, 관청의 처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판결 내용에 대해 이처럼 증명을 신청하여 받게 되는 입안이 결송입안인 것이다.
--- pp. 29~31, 「결송입안과 문서생활」 중에서


김상묵(金尙?)은 영·정조 때 문신으로 대사간까지 지냈다. 1776년(정조 즉위년) 7월 그는 안동부사로 부임하였다. 조선 후기는 산송(山訟)이라 불리우는 묘지 관련 소송이 넘쳐나던 시기이다. 이 고을에도 뫼터 문제로 송사하는 이가 있었다. 한 쪽은 법흥(法興) 이(李)씨이고, 상대방은 새로 집권 노론에 붙은 사람으로, 이씨의 뫼터를 불법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수령이 바뀔 때마다 판결이 있었지만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김상묵이 부임하자 다시 제소되었다. 부사는 몸소 산소에 가서 살펴보고서는 불법점유자에게 “네가 파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때 그의 항변이 절묘했다.
“이미 세 번에 걸쳐 판결을 얻었으니 법리상 심리해서는 안 되는 사안입니다.”
하지만 김상묵의 태도도 단호했다.
“판결이 공정하지 않았는데 어찌 세 번이란 것에 구애되겠는가.”
이처럼 말한 뒤 곤장을 쳐서 가두고는 날짜를 정하여 묘를 옮기도록 하자, 민심이 기뻐했다고 한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삼도득신한 이후에도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는 판결의 확정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장애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판결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져 그것으로써 확정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잘못 판단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때문에 세 번까지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인간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삼도득신법에는 이러한 의미도 틀림없이 있다. 하지만 세 번까지 다시 살펴볼 기회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명백한 부정으로 이루어진 오판임이 뚜렷이 밝혀진 경우에조차 형식적 확정력을 들어 구제를 거부하는 것 또한 권리의 보호와 구제라는 민사소송의 목적을 무색케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대하여 현행 민사소송법은 재심(再審) 제도를 두고 있다. 곧, 종국판결로 확정된 사안이라 할지라도 제척사유에 해당하는 법관이 재판에 관여한 때, 법관이 그 사건에 관하여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때, 남을 허위로 자백시키거나 상대방의 공격·방어방법의 제출을 방해한 때, 문서의 위·변조나 허위 진술이 있었을 때, 판결에 영향을 미칠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판단을 빠뜨린 때 등에는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들은 조선시대에서도 재심을 호소할 만한 사유일 것이다. 다만 현행법과 달리 재심사유가 법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재심사유가 폭넓게 또는 유연하게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이미 판결의 확정력을 위해 삼도득신법을 정립하였지만, 그것의 무조건적인 적용이 실질적 정의를 지나치게 훼손한다고 여겨질 경우에는 다시 심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실질 중시의 사고가 실제로는 너무나 억울하다고 느껴질 경우를 구제하도록 법을 운용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결국 삼도득신법의 기능을 약화시켜 판결의 확정이라는 개념이 정립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pp. 96~97,「삼도득신법에 대한 반발」 중에서


소지라는 것은 관청에 내는 신청서이다. 따라서 여러 종류의 신청이 있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 판결을 구하는 소지를 제출하게 되면 그것이 소장(訴狀)이 되는 셈이다. 소지를 제출하는 행위, 곧 소를 제기하는 것을 고장(告狀)이라 한다. 소지는 발괄[白活]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이 연명하여 올리는 경우를 등장(等狀), 수령의 판결에 불복하여 감사나 어사(御使)에게 올리는 소지를 의송이라 한다. 소지를 접수한 관청은 그에 대한 처분을 내리게 되는데, 대개 소지의 여백에다 직접 써 주었다. 이를 제김(뎨김, 題音) 또는 제사(題辭)라 한다.
제출된 소지에는 대개 ‘피고를 데려오면 처결해 주겠다’는 제김이 내려진다. 피고를 송정(訟庭)에 데려오는 일은 원고의 구실인 것이다. 하지만 척(隻)을 데려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황새 결송」의 그 놈처럼 순순히 따라와 주는 것은 오히려 드문 일이고, 대부분의 피고들은 현재 상태에서 이익을 보고 있는 경우이므로 따라가려 하지 않는다. 농사일이 바쁘다거나 부모님이 병환 중이라는 따위의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 원고는 다시 소장을 작성하고 끝자락에 피고가 관령(官令)에 불응한다는 내용을 덧붙여 제출한다. 그러면 수령은 다시 피고를 데려오라는 제사를 써준다. 이 과정이 몇 차례 되풀이되도록 피고가 출석하지 않으면 그제야 관장(官長)의 명을 거역하는 놈이라 하여 형리를 시켜 잡아오게 한다. 다물사리도 또한 법정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실랑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고의 지위가 높거나 연줄이 있으면 이 과정이 생략되거나 짧아질 수 있을 것이다.
형사소송에서는 이처럼 진행될 리가 없다. 이 점에서 민사와 형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태도가 보인다. 민사 영역은 기본적으로 국가 공권력이 개입하는 부분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사소송은 형사소송과 달리 절차 진행이 당사자에게 맡겨져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당사자주의라 하는데 현행 민사소송제도도 그것을 채택한다. 결국 형리를 보내 국가 강제력을 동원하는 것은, 관령 위반이라는 형사상 구성요건을 성립시켰을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 pp. 102~105, 「소송의 비롯」 중에서


영조 때의 문신인 고유(高裕, 1722[경종 2]~1779[정조 3])는 창녕현감으로 있을 때 소송 처리를 잘하여 고창녕(高昌寧)으로도 불리었고, 청백리에도 올랐다. 그리하여 많은 기발한 원님 재판들이 그의 이름을 빌어서 전해지기도 한다. 잘 알려진 망부석 재판, 옹기장이 재판 따위는 고유의 판결이라고도 전해지는데,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재판으로 뚜렷이 역사서에 나오는 사건도 고창녕의 전설이라며 전해지는 일도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원님 설화가 경상남도로 가면 죄다 고창녕의 일화가 되어 버린다. 다음의 설화도 그런 사례일 것이다.

고유가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고을 원님으로 부임했다. 처음에 향리들은 그를 어리다고 얕보면서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자기들끼리는 소맷자락에 넣고 흔들게 생겼다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고유는 아전들에게 수숫대를 뽑아 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수숫대를 들고 온 서리들에게 그는 “그것을 통째로 소매 안에 넣어 보라.” 하고 명하였다. 황당하여도 수령의 명령인지라 육방 관속들은 넣어 보려 하였지만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자 고유는 “한 살 먹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들어가지 않는데, 13년이나 된 고을 목민관을 소매에 넣고 흔들 수 있겠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그 뒤부터는 누구도 어린 사또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고유가 생원이 된 것도 스무 살이 차서였으니, 열다섯 살에 고을 수령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이 또한 설화의 내용에 고창녕이 어울리기에 그 이름이 붙어 전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 호통 치는 고유의 모습을 통하여, 녹록한 목민관이 부임하게 되었을 때 고을 아전들이 그를 업수이 여기기도 하는 당시의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관속들은 위 설화에서처럼 노골적으로 능멸하기보다는 고을 사정을 모르는 수령이 알아채지 못하게 농간을 부리는 쪽에 더욱 능했을 것이다. 덜 떨어지는 수령을 아전들이 골려먹는 야담도 적잖이 전해진다.
--- pp. 114~116, 「아전」 중에서


당연히 당사자들의 모습이나 주장만으로는 진실을 알기 어렵다. 말하는 것만 듣고 귀신같이 알아 판결하는 것은 대단한 천재나 하는 짓이지 함부로 흉내낼 일이 아니라고 다산(茶山) 정약용은 경고한다. 하지만 당사자가 스스로는 잘 꾸몄다고 한 것이 그 주장 자체에서 모순이 나타나 들통나는 경우도 있다. 정약용도 임진왜란 때 군공(軍功)을 세워 정릉참봉(貞陵參奉)에 제수되었다는 당사자의 주장에서 위조문서의 제출을 대번에 알아챈다. 정릉에는 태종 때부터 참봉이 없다가 숙종 때 와서야 참봉직이 복원되었으니, 임진년 무렵에 정릉참봉이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경험법칙에 어긋남을 발견해내는 수도 있다. 고상안(高尙顔)은 나주의 이 소송이 있기 5년 전인 1581년(선조 14년) 가을에 경상도 함창현감(咸昌縣監)으로 부임하였는데, 그 때 겪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갑(甲)이 와서 “할망구가 밤이 되어 도망갔는데, 이는 아무 마을의 을(乙)이 꼬여낸 게 틀림없으니 처벌하여 주십시오.” 하고 고소하기에, 바로 을을 잡아다 심문하였다. 을은 “저는 갑의 첩도 중매 서준 사람인데, 본처를 꾀어 남에게 줄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을이 한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갑에게 물으니, 갑은 “우리 집 물건이 을의 집에 많이 있어서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을은 “팔기에 샀을 뿐퓀니다.” 하고 맞섰다. 나는 을에게 말하였다. “갑에게 첩을 소개한 이가 너라면, 본처는 너를 원수처럼 여겨 네 집에 불을 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너에게 물건을 팔겠는가? 팔았다는 것은 네 아내와 서로 내통하고 있다는 얘기이니, 네가 꼬여 내었다는 것이 불 보듯 뻔하구나.” 알고 보니, 을의 아내가 갑의 아내를 꾀어 친척에게 주기 위해, 먼저 갑에게 첩을 들여 주어 의심을 푼 뒤 갑이 첩의 집에 있을 때 그의 아내를 빼낸 것이다. 투기하는 일반적 성향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곡직을 밝혀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씨와 임씨의 분쟁에서 김성일이 사건을 보고서 대번에 곡직을 알아챘다는 것도 이러한 경우들에 해당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각자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사실을 구성하여 진술하는 당사자들의 말만 듣고서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연히 송관은 어느 쪽 진술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당사자는 자신이 주장하는 사실을 법관이 믿게끔 하려고 여러 가지 증거를 제출한다. 재판을 하는 이는 이렇게 법정에 나온 증거자료들을 잘 조사하여 진정한 사실을 밝혀내고 그에 상응하는 법 적용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 p. 153~156,「증거조사」 중에서


노비의 투탁은 여러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양인이 투탁하여 노비가 되기도 하고, 노비가 다른 주인에게로 귀속하려 하기도 한다. 종들이 고르는 상전은 사가(私家)이기도 하고 공가(公家)이기도 하여 일정한 것은 아니나, 주로 관청이 주로 이용되었다. 투탁이 주로 이루어져서 자주 문제되는 기관은 내수사(內需司)이다.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는 관서로서 공적인 관리를 위해 정식 편제된 국가기구였지만, 사실상 왕가의 사금고 역할을 하였다. 초기에는 본궁(本宮)이라 불렀을 정도이다. 국왕을 등에 업은 탓에 쉽게 재산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침탈하는 등의 폐해가 많았다. 이의 주요한 수단이 투탁이었다. 내수사로 투탁한 노비에 대해서는 회복이 쉽지 않았다. 왕실 금고의 위세에 송관들도 제대로 판결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지적되는 노비의 투탁 방식은 요즈음의 소송 사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선 본주인을 배반하려는 노비와 이미 협의가 되어 있는 새 상전네서는 그 종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도망노비라고 소를 제기한다. 척은 이에 맞서는 척하다가 적당히 자백한다. 그리하여 원고는 승소 판결을 얻게 되고 그 노비를 부리게 된다. 미리 호적에 암록 등의 조처를 해놓으면 더욱 완벽하겠다. 본주인이 나중에 이를 알게 되겠지만, 다시 찾아오는 것은 그야말로 지난하다. 더구나 상대방이 권문세가이거나 하면 엄두도 못 낸다.
구지가 쓴 수단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공노비로 투탁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먼저 재력과 친분을 이용하여 영암군의 노비빗리와 협의하였다. 그 결과 일가친척 없이 죽은 성균관비 길덕의 소생으로 맞추면 적당하겠다고 얘기가 된 듯하다. 그리하여 영암군에서는 다물사리에 대하여 성균관비 길덕의 소생인데 누락되었으니 천안에 다시 넣어야겠다고 추궁하였다. 이에 다물사리는 1584년 7월 25일 스스로 관가에 출석하여, 어려서 부모가 죽어 이리저리 떠돌다가 그리 되었다고 자백하였다. 이 때부터 다물사리와 그의 딸, 손자, 손녀들은 영암군의 천안에 이름을 올리고 성균관에 신공을 바쳤다. 물론 이지도의 집에는 더 이상 앙역도 신공도 들이지 않았다.
말도 안 듣고 신공도 끊기자 이지도는 직접 받으러 갔다. 하지만 번번이 구지는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문전박대할 뿐 아니라, 작대기를 휘두르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자기의 처자식들은 성균관 소속인데 어딜 와서 허튼 수작이냐고. 이지도가 알아보니 다물사리가 영암군에 성균관비로 올라 있는 것이었다. 관아에 가서 그녀는 자기 집안 노비의 아내라고 따지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영암군으로부터 다물사리는 성균관비 길덕의 소생으로서 어려서 행방불명이 된 탓에 추심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확인이 되어 관비로 올리게 된 것이라는 대답만 들었을 것이다. 이제 이지도는 소를 제기하여 시비를 가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 pp. 190~192,「구지의 작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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