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연말쯤 대학 홍보차 들린 디트로이트에서 초면의 김호길 학장은 ‘속이 매우 당찬 분’이라 느꼈다. ‘시시한 퇴물은 안 되고 쟁쟁한 학자들만’ 와야 할 것이라고 배짱을 퉁기고 있었다. 갈 사람이 “나요, 나요” 하고 나서는 것도 아닌데…. 1986년 5월에 나는 서울공대와 카이스트에 세미나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 소식에 학장은 항공권을 보내며 내가 먼저 예약한 것을 취소토록 하였다. 당시 형체도 없던 포항공대는 가상 현실인데도 학장은 반드시 포항 현장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 남다른 ‘고민’이 있었다. 다우(Dow)연구소 생활을 정리하며 몇 대학에 인터뷰하고 있던 때였으나 ‘한국 방문 인터뷰와 세미나라는 고민’을 특별히 하고 있었다.
---「1장│포항공대를 설립하다 “불안한 귀국 방문과 암울한 시대”」중에서
포항공대 대학원 개설 건, 문교부에서 허가를 받고 생명과학과도 신설 요청하였다. 1988년, 이듬해 총 석사 250명, 박사 70여 명 정원으로 되고… 결국 석사 500명, 박사 500명 정도로 성장하는 목표를 설정함. 포항 방사광 가속기 연구소도 건설한다. 김호길 학장은 가속 장치 건설에 여러 가지 협조를 당부했다. 사실 학장은 개교 전 이미 가속기 센터를 후속 사업으로 상정했고, 성공적인 포항공대 설립에 만족한 TJ가 학장의 개교 성공에 답례했다. 호사다마인가? 학장은 두 마리 토끼를 쫓기 시작했는데 우수함을 지향하나 우려도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가속기 준공 전 유명을 달리하고 대학의 급성장형 발전이 막혔다.
---「2장│동서 냉전의 종식과 그 여파 “대학원 신설 허가 및 방사광 가속기 건설”」중에서
개교 시 1987년 벽두 박태준의 뜻이 교수들에게 전달된바 역시 포철 ‘경영다각화’였다. 반도체에 관심을 보인다는 소리에 나는 IBM의 강성권 박사로부터 김경민 박사를 소개받고 안내하였다. Si 웨이퍼 생산업체인 미국 Siltron 회사도 접촉했지만, 수년 후 SK 실트론이 생기고 포철의 방향은 달랐다. ‘경영다각화’라는 큰 모습의 실체는 묘연한 가운데 몇 년 후 말썽 많던 역사의 파행에 나대로의 아쉬움을 적는다. SK가 실트론을 가져간 92년경 SK와 포철이 심각하게 대립한 것이 하나 더 있으니 이동통신 사업권이었다. 1992년 6월경부터 93년 초까지 혼란스러운 기사들이 경제계 전체를 뒤흔들었다. 약 30년 전이지만 여러 언론 보도에 근거한 요약은 다음과 같다. …
---「3장│경영다각화 ― 박태준, 김호길 “경영다각화의 역행: 정보통신연구소 박태준 묵언”」중에서
2006년 7월, 서남표 MIT 기계공학과 석좌교수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며 카이스트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교수 영년직(tenure) 심사 강화와 학과장 중심제를 주도했다. 그 외 100% 영어 강의, 미래 잠재력으로 교수 채용, 인성 평가 중심의 입시 개혁, 성적 하위 학생에게 등록금 부과, 에너지 환경 물 지속가능성(EEWS) 연구 방향 설정 등 서 총장은 가시적인 카이스트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새로운 운영체제, 교육, 연구, 기반 시설, 조직 구성, 재무까지… 대학 개혁을 실현했다. … 과반수 구성원이 동의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이도 있다. 개혁이 연착륙한 것은 (방해를 많이 받았던?) 러플린 전임 총장에게 감사하다. 반발하는 교수들, 원로급 교수들, 교수협의회 중심, (이메일을 하던 교수 얘기) 카이스트 석사 1기생 그룹의 중심에는 “1기 출신이 총장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의 주도 멤버가 (2013년 3월 내가 떠난 후) 학내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는 소식에 놀랐다.
---「4장│포항공대-카이스트-한동대-서울대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 2: 한국 교육에 남기는 마지막 충언”」중에서
우리 대학에 있어서 나노기술집적센터의 유치는 의미가 컸다. 나노기술집적센터는 2009년까지 총 1,800억 원이 투자되는 사업으로 1994년에 완공된 방사광 가속기 이후 이러한 규모의 대형 과제를 지원받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최첨단을 달리는 나노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고가의 일관 장비와 기술이 필수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나노기술의 발전을 위해 연구에 필요한 장비와 인력을 모아 나노기술집적센터를 연구 ? 개발 ? 산업체 지원을 한곳에서 할 수 있는 나노기술 연구의 허브로 만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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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노기술 연구에는 학제 간 연구가 필수적이다. 나노기술의 발전은 학제 간 연구에서 이루어졌다. 1981년 IBM 연구소에서 개발된 주사형 터널링 현미경은 원자 단위의 크기를 관찰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이를 이용해 원자 혹은 분자로 제어하고 조립하는 나노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노기술은 소재, 소자, 생명공학과 결합해 여러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6장│분기점과 기승전결 “나노기술집적센터의 유치”」중에서
임길진 교수의 총장 초빙은 내부적인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임 교수도 무척 아쉬워했다. 그 후 임 교수는 다시 포항에 나타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비운의 별이 되고 말았다. 임길진 교수! 그를 수용하지 못한 포항공대가 이제 비운의 길을 걷는지 모를 일이다. 혹 그가 총장으로 부임했다면, 미국 캠퍼스에서 갑자기 만난 교통사고가 없었을 텐데… 무척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아, 너무도 아까운 별이여!
---「6장│분기점과 기승전결 “아, 너무도 아까운 별이여”」중에서
포항공대는 1986년 개교하며 고 김호길 학장의 선견지명으로 반도체 중점 플랜과 연구 장비 투자를 획기적으로 추진하여, 삼성전자와 4반세기의 상호 산학협력 역사를 쓰며 수백 명의 석 · 박사 졸업생들이 삼성맨이 되었고, 대학은 전 삼성전자 회장 ‘권오현 강의실’을 지정하며 감사를 표시하였다(본서 텍스트의 내용에 30여 년 역사를 정리). 안타깝고 아쉬운 바를 시급히 지적하면, 고 김호길 학장과 의기투합,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병역 문제를 해결하려던 것이 실패하였다. 젊은 이공계 대학원생들을 군에 보내서 창의력이 샘솟는 수학 두뇌들을 수년간 녹슬게 썩히는 것은 이적행위에 해당하는 짓이라고 거듭 주장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국가 위급 상황에도 일본은 이공계 학생 두뇌의 보호를 위해 병역을 막았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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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는말 앞의 사진은 2003년 별세하신 노벨상 수상자 프리고진 교수님 부부가 1997년 초청 강연차 포항공대를 방문하시던 모습이다. 언제든지 벨기에로 오라고 하시던 교수님과 당시 15년간 얽혀있던 연구 주제를 풀지 못하고 IMF의 어려운 시기 반도체레이저 연구에 묶여 매몰되었던 세월이 한없이 안타깝다. 그러나 10대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의 미래세대는 “선진 백년지대계”를 꽃피울 것이다. 한예종 학생 임윤찬 군(손민수 교수 사사)의 60주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이 서광을 비춘다. 인생은 가지만 기술은 기다린다. 코-주-부(코로나-주식-부동산)의 부정 불신의 5년 사회 혼란에서 먼지를 털고 주저앉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며 공정 신뢰 선진의 길을 달려야겠다.
---「“맺는말”」중에서
1986년 포항공대는 예정된 드라마가 아니었다. 미국 박사 셋만 데려다 1년만 포항에 붙들어 놓으면 술을 크게 사겠다고 빈정거렸던 유명한 얘기는 당시 귀국한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한국의 신흥 대학들이 그런 이변을 보일 것이라고 떠들던 몇 번의 실패한 과거 사례들에 국민은 이미 익숙했다. 그들이 엉터리 홍보에 속겠는가? 유명대입학원에서는 포항공대에 흥미를 가진 학생들에게 “아서라. 거긴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을 곳이다!” 한다. 그런데 포항공대는 우뚝 솟았다. 600만 불 연구 장비들 덕에? 홍보로 포장했던 저명 중진 교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또 멋진 △교지 △교사의 좋은 환경이었기에? 아니다! 믿음직한 중진 교수들 덕을 조금 보긴 봤다. 운이 좋은 학과에는 가물에 콩 나듯 그런 중진 교수가 있었다.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였다.“기적은 아니었다. 젊은 교수들 땀으로 열매를 스스로 가꾸어내며 쌓은 소금기에 젖은 삼립빵이었다. 결과적으로 정리하매 저명한 중진 교수가 없던 학과들도 잘 성장했던 걸 보면 중진 교수의 지도보다는 젊은 교수들의 상호격려와 노력이 핵심이라 하겠다.”
---「부록│암울한 시대, 지/사/대에 대한 제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