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의 저자이자 미래학자인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가 역사를 더 잘 이해할수록 역사는 그 경로를 빠르게 변경하고, 우리의 지식은 더 빨리 낡은 것이 된다”. 우리는 결국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변화 특징을 일명 ‘VUCA’라고도 한다. 변동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약자로 다가올 미래상이 모호하고 변동이 크며 복잡한 데에다 그것마저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4차 산업혁명을 예측하는 콘텐츠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1년이 지나기 전 상당수 예측은 낡은 것이 되거나 틀린 것이 된다. 우리가 4차 산업시대의 정점을 맞이하기 전에 기술 자체보다는 그 특성과 사회적 변화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 지표가 아닌 거시적 흐름을 보아야 한다.
---「서문」중에서
노동의 비정규화 현상은 이제 더는 바꿀 수 없는 추세로 보인다. 기회는 상류층 노동자에게 집중되고 커리어가 약하거나 국가의 안전망이 헐거운 나라의 노동자들은 플랫폼으로 흡수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고숙련 노동자에겐 ‘탄력성’을 의미한다. 그들에겐 이직의 ‘기회’이며 오랜만에 남태평양의 섬에서 몇 달간 가족과 휴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하류층 노동자에게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플랫폼의 변덕이나 시장의 변동에 따라 실직하면 다시 일거리를 찾아 나서야 함을 의미한다. 일상의 안정이 유지될 수 없다.
---「데이터이즘(Dataism)과 인간의 가치」중에서
이렇듯 결코 자동화될 수 없는 일이 존재했기에 인간의 노동은 단순노동에서 복합적이며 고도의 사유를 필요로 하는 고차원적 노동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했다. 이런 낙관론이 유지될 수 있는 근거는 당시 기계기술의 제약 때문이었다. 늘어난 생산성으로 인한 수요를 인간이 차지할 것이라는 낭만적 환상이었다. 하지만 기업들은 늘어난 생산성으로 인한 수익을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새로운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투자하고, 해고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임금은 동결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지했다. 이런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역사는 종언하였는가」중에서
영화 〈매트릭스〉에선 인공지능이 인간을 사육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큐베이터에 담긴 인체에 흐르는 6V가량의 미세전류를 인공지능과 로봇의 동력원으로 사용한다. 물론 이것은 영화의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다. 그런데 나노 바이오 기술과 웨어러블 센서의 진화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욕망했던 환상을 메타버스가 재현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실제와 똑같이 보고 느끼는 판타지 말이다. 과학자들은 늦어도 10년 이내에 이러한 기술이 상용화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머리와 몸에 센서를 장착한 채 달콤한 꿈에 빠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인간의 노동력이 볼품없어져 일자리가 사라진 시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건 끔찍한 일이다.
---「역사는 종언하였는가」중에서
팬데믹 초기, 영국과 미국 정부가 초기에 의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축소해서 공표한 것은 단순한 선의였을까? 이것 역시 일종의 신뢰 게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공표했을 때 군중은 패닉에 빠질 것이고 사재기는 물론 경제활동이 심하게 위축될 수 있다는 정무적 판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더 조밀하게 연결된 사회에서 ‘신뢰’라는 통합 가치는 사회와 국가, 경제라는 시스템의 방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공동체주의와 신뢰자산」중에서
당대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이론은 이후 ‘상호부조 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21세기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애초 러시아의 명문 귀족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시베리아 수용소의 현실을 알고 난 후 혁명에 투신했다. 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군 교도소에 투옥된 그를 동료들은 대담한 작전으로 빼내 국외로 망명시켰다. 그와 동료들 모두 목숨을 걸고 활동한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다윈의 진화론이 러시아의 수많은 혁명가와 혁명 과정에서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진화론과 협력하는 인간」중에서
이제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로 다가가야 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자본주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기업이다. 기업이 자본주의의 엔진이라면, 그 방향성에 일부 관여하는 쪽이 소비자이며 폭주를 관리하거나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면 개입하는 주체가 정부다. 기업이 반사회적인 노동환경을 노동자에게 강요하거나, 자국의 환경을 황폐화하면 국가가 나서서 제지하고, 소비자들은 해당 기업을 ‘악덕기업’으로 규정하고 불매운동 등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타격한다. 그렇다면 국가(사법당국)가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은 어느 정도 될까.
---「기업가치의 변화」중에서
그(비저 박사)는 아파르트헤이트가 단순한 인종차별정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소수에게 독점적 이익이 돌아가도록 설계한 경제·사회 시스템 그 전체를 의미했다. 오늘날 기후위기와 생물 다양성 손실, 독점과 착취, 불평등과 부패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원인이 아닌 증상에 주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제, 기술, 인간, 사회 및 생태 시스템의 상호 연결성을 보고 행동하는 시스템 사고를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유가치창출(CSV)과 통합가치창출(CIV)」중에서
닭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생산성은 최하를 기록했다. 끊임없이 싸우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언제 자신과 알을 공격할지 모르는 동료의 위협으로 닭들은 알을 낳지 않았다. 라슬로 박사는 지적한다. “재능 있는 사람을 채용할 때 팀의 성과보다 개인의 성과를 우선시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실제로 팀워크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은 동물종을 불문하고 한결같이 파괴적이다. 집단을 주도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도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통합가치와 기업문화」중에서
문제는 사람에게 작동하는 이런 기제가 사회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불행한 시스템으로 인해 ‘우리’가 고통받을 수 있다는 우려 대신 ‘나만은’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은 때로 협동과 연대를 무가치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에게 20년 전으로 돌아가 사회시스템을 재구성할 기회를 준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같이’의 가치, 협력하는 공감사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