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좀 걸을까.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뱉은 말이었다. 찻길에는 여전히 사람들뿐이었다. 저렇게 젊어서 어떻게 살까 싶도록 젊은 사람들. 그들은 용산 쪽과 남대문 쪽으로 크게 갈라져 흩어졌다. 흩어지며 작은 무리들을 이루어 나아갈 때, 그들의 노래와 외침이 부딪치고 섞이며 너울너울 밤하늘로 올라갔다. --- p.62
그 남자랑 결혼할 거예요? 형이야. 그 형이랑 결혼할 거냐구요. 너 같으면 하겠니. 나 같은 애랑. 나 같으면 해요. 누나 같은 여자 말고, 누나랑. 그러니까 니가 아직 어리다는 거야.(67쪽)
너 장준하 선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그렇게 묻는데 그 양반이 누구냐고 묻기는 쉽지 않았다. 얘네 학교 선생인가. 한수는 요행을 바라고 말했다. 고혈압? 미자는 한수가 알 만한 사람 얘기로 건너뛰었다. 박정희가 제일 잘못한 게 뭐라고 생각해. 그 문제라면 한수도 할말이 있었다. 자기 아내를 지켜주지 못하고 대신 죽게 놔뒀지. 미자는 한수를 지그시 바라본 뒤에 말했다. 넌 참 엉뚱해. 엉뚱한 건 너라고 한수가 말하려는데 미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좋아. --- p.114
누가 우리의 평화를 해치려 하는가. 가만두면 그 훼방꾼이 또 무슨 흉계를 꾸밀지 모른다고 한수는 생각했다. 살려두면 안 돼. 그자가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인생은 계속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한수는 확신했다. 없애버려야 해. 제거하지 못하면 제거당한다. (……)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이상한 피가 심장을 거쳐 뇌혈관에 스며들었다. 그자는…… 스르르 눈 감기 직전에 한수는 상대방의 정체에 대한 심증을 굳혔다. 그것은 매우 독창적인 판단이었다. 한수에게 제거 대상으로 찍힌 그자는 통행금지를 없앤 장본인이었다. --- p.154
노래가 끝난 뒤에 시인은 말했다. 숱한 언어들 속에 나의 보잘것없는 한마디가 보태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듣고 싶지 않아 귀를 막아도 시인의 말은 들리지 않는 소리로 들려와 속수무책이었다. 지긋지긋하게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음을 네가 모르지 않을진대 요구하지 마, 요구하지 마! 강요하지 말 것. 숨을 고른 뒤에 시인은 말했다. 구체적인 것이다, 산다는 건. 그 말의 뜻을 헤아리기가 너무 고통스러운 이들을 위해, 시인은 잊혀졌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사슴 사냥꾼의 당겨지지 않은 방아쇠』는 전두환에 대한 소설이 아니고, 80년대의 역사를 다루는 소설도 아니다. 이것은 ‘젊음’과 ‘순수함’의 서사화이자, 그것들에 수반되는 안타까움과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이며, 나쁜 피가 나타났다 사라진 구 년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그것뿐이다. 그러나 이쪽의 절박함이 없다면, 이 소설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80년대의 역사에 대한 평가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