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가 날 차버린 것 때문에 내가 안쓰러워서 그런 거라면 안 하셔도 돼요. 뭐 진우 형님이 동생이 차버린 여자 뒤치다꺼리해주는 사람도 아니고 솔직히 동우 때문에 상처 입은 거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남자 소개시켜주겠다는 사람도 많구요.”
세영의 말에 진우가 심각해진 얼굴로 김치 통에서 김치를 꺼내는 세영을 쳐다봤다.
“만나다 보면 괜찮은 남자 걸리겠죠. 결심했는데 두 번 차이는 건 못할 짓이다 싶어서 어느 정도 괜찮다 싶으면 결혼할까 해요. 서른이 코앞이라 안 그래도 우리 부모님 나 시집 못 갈까 봐 걱정이신데 능력 있고 인물 아주 못 봐줄 정도만 아니라면 결혼할까 해요. 동우 때문에 충격 먹어서 그런 점도 있지만 솔직히 이제 안정을 찾아야 할 때다 싶거든요. 그리고 뭐 동우만 잘난 게 아니라 나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꽤 있어요. 동우도 알겠지만 동창 중에 회계사 한 명 있는데 성현이라고 동우도 알아요. 성현이 나 동우랑 깨졌다는 얘기 듣고 신났대요. 어제 성현인 모임에 안 왔는데 미영이한테 전화해서 꼬치꼬치 묻더래요. 정말 깨졌냐, 깨진 지 얼마 됐냐, 지금 내 기분 어떻다더냐…….”
세영이 김치를 썰어 접시에 담고는 김치 통은 도로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랑 때문에 다친 상처는 사랑으로 다시 고친다잖아요. 그리고 성현이 걔 괜찮아요. 인물도 좋고 회계사니까 돈도 잘 벌고. 뭐 꼭 성현이하고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지만, 이젠 나도 자유롭게 남자를 만나보겠다 뭐 그런 얘기예요. 하기 좋은 소리로 여러 여자 만나보고 여러 남자 만나봐야 한다잖아요. 여러 남자 만나보려구요.”
세영이 아까 다 데워졌다고 신호 보내고 멈춘 렌지 앞에 석고처럼 서 있는 진우를 본체만체하고 전자레인지 문을 열어 행주로 밀폐용기를 감싸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동우 때문에 멍청하게 울면서 시간 보내진 않아요. 그러니까 혹시라도 내가 안쓰러워 이러시는 거라면 걱정 마세요. 어제 술 많이 마신 것도 내 기분 그다지 저기압 아니었는데 친구들이 나 엄청 괴로워하는 줄 알고 나만 퍼 먹여서 그런 거예요.”
“그럼 동우는 확실하게 잊을 수 있다는 건가?”
“네. 그럴 수 있어요. 물론 아직 아주 조금은 상처 때문에 아프긴 하지만. 하지만 죽고 싶거나 그런 기분은 절대 없어요. 죽긴 왜 죽어요. 남은 세월이 얼마나 많은데, 남자 배신했다고 죽거나 식음을 전폐하는 짓 정말 한심하잖아요. 그렇다고 너무 멀쩡한 것도 이상하지만. 너무 멀쩡한 건 아니에요. 충격이 있긴 있어요. 하여튼 동우는 정리할 거예요. 시급하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군.”
진우가 말했고 세영이 밥을 담다가 진우를 쳐다봤다.
“다행이죠.”
진우가 세영의 곁으로 오더니 세영을 돌려세웠다.
“동우는 깨끗하게 잊어.”
진우가 세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럴 거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그거 하지 말아요.”
“뭘?”
“내 어깨에 손 올려놓는 거요.”
“왜?”
“떨리잖아요.”
세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진우가 이상한 기분에, 아니 뭔가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세영을 바라보았다.
“어제도 그렇게 말했었지.”
“무슨 말이요?”
“잠결에 떨린다고.”
“그럼 어제 내가 자는 동안에 날 만졌단 말이에요?”
세영이 쏘아붙이는데 진우가 세영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 어, 그거 하지 말라구요.”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
“설마 키스하려는 건 아니죠? 그거 하지 말아요.”
“왜?”
“떨린다고 했잖아요.”
세영이 진우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진우의 손을 붙잡는데 진우가 세영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였다.
‘아, 제발, 키스하지 말라구요. 당신 얼굴만 봐도 흔들리는데…….’
세영은 진우의 입술을 느끼며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진우의 입술에 막혀 소리칠 수가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키스하지 말라는 말,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키스 해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키스 해달라고. 당신의 키스가 너무 그리웠다고. 하지만 이래선 안 될 일이었다. 그의 키스를 그리워해서도 받아들여서도 안 될 일.
세영이 물러서는데 진우가 억센 팔로 세영의 허리를 휘감더니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세영이 들고 있던 뭔가가 툭 떨어졌고 세영은 자신이 떨어뜨린 게 밥을 푸는 주걱이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때 진우의 혓바닥이 세영의 입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진우의 키스는 거칠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예전에, 예전에 아주 어릴 적 딱 한 번 맛보았던 키스라는 달콤한 그것이 어찌나 그립고 굶주렸던지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다면 질릴 만큼 해보리라 결심했던 사람처럼 우악스럽게 세영을 끌어안은 채 사납게 세영의 입 속을 헤집고 다녔다.
진우를 처음 만났던 날, 동우 때문에 진우의 차에 화풀이를 해댔던 날 진우와 나누었던 키스 때문에 세영은 문득문득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하려고 했던 것도 아닌데 불쑥 진우의 입술이 떠올랐고 그의 열정적이었던 키스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서 한참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아니, 하늘에 맹세코 진실을 말하자면 진우의 입술이 아니라 진우의 얼굴만 봐도 이젠 설렐 지경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동우의 형님이 아닌가.
동우에게 배신당하던 날 동우의 형과 키스를 했다는 말을 하면 동우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얼마나 헤픈 여자로 알까. 아니, 얼마나 싸가지 없는 여자로 볼까. 할 짓이 없어서 옛 애인의 형을 유혹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닌가. 절대 그게 아닌데, 키스한 쪽도 진우고 세영은 그저, 단지 거부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래도 동우는 아마 세영을 몰아세울 것이다. 네가 나쁘다고, 네가 헤픈 여자라고.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세영의 몸이 굳었고 세영에게 뭔가 변화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진우의 키스가 더욱 격렬해졌다. 세영의 입 속에서 허우적대는 진우의 혓바닥이 세영의 혓바닥과 엉켜들었다. 세영은 진우의 격정적인 키스에 아찔함을 느끼며 머릿속을 아프게 하던 동우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잊어버렸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