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읽기에 앞서 차례를 훑어보면 알겠지만 필자는 대체로 이 책을 오늘날 비교적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융화”에 초점을 맞추어 구성하고 집필했다. “융화”는 “융합?종합?통섭?통합” 등으로도 부를 수 있지만 필자는 이 용어들의 여러 측면들을 비교 검토한 끝에 “융화”가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되어 이를 택했다. 이에 따라 이 책은 과학과 여러 다른 분야들 사이의 관계를 차분히 살펴보면서 장차 우리의 앎과 삶이 어떻게 이끌어져야 바람직한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내용을 담게 되었다.
그런데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이러한 융화의 서술에서 그 중심은 과학이란 점을 미리 밝혀둔다. 본문에서 여러 차례 적시하지만 과학의 본령은 “앎의 추구”이며, 이러한 본원적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육체적?정신적 활동이 여기에 수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분야들을 가벼이 평가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그 모두가 앎의 추구라는 과정에서 아름답게 한데 어우러져야 할 소중한 융화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융화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앎과 삶의 의의를 찾는 여정에 나서게 되며, 이런 뜻에서 책의 제목을 [과학의 성배를 찾아]로 삼았다.
---「머리말」중에서
우리가 과학을 통해 영위하고 있는 삶은 최첨단의 것이며, 이 때문에 현대의 과학문명은 역사상 가장 깊고도 넓은 의미들을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세대가 이처럼 풍성한 의미를 널리 공유 및 향유하고 있지는 못하다. 겉으로는 과학문명의 현란한 이기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며 편리한 생활을 만끽하는 듯 싶다. 하지만 안으로는 배경에서 운행되는 중요한 과학적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허전함과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다.
그 까닭으로 많은 이들이 현대의 과학적 지식이 고도로 전문화되었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맹자가 남긴 “박학이상세지 장이반세약야(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 널리 배우고 자세히 살펴봄은 근본으로 돌아가 간략히 말하기 위함이다)”라는 말을 돌이킬 필요가 있다(여기의 ‘說’은 ‘설’이 아니라 ‘세’로 읽는다). 이처럼 옛날에도 사람들은 깊고 넓은 지식을 잘 정리하고 걸러서 널리 공유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곧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 지식을 널리 공유하는 일은 시대를 초월한 요청이며 전문화가 두드러진 현대만의 특징은 아니다.
--- p.20
그런데 진공관을 사용하여 음을 크게 증폭하면 본래의 음이 일그러지는 왜곡이 일어나며, 이는 나중에 트랜지스터가 나오면서 많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진공관이 왜곡한 음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은 본래의 음에 더 가까운 트랜지스터의 증폭 음을 오히려 멀리하게 되었다. 이른바 “찢어지는 듯한 굉음”에 열광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아날로그와 디지털 음향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CD와 DVD 등에 기록된 디지털 음향이 더 보편적이지만 아직도 예전의 LP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는 아날로그 음향이 어딘지 더 따뜻하고 포근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아날로그 음향의 이런 특성은 본래의 자연음과 상관없는 LP판 고유의 특성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진공관과 LP판 음악은 실제로는 자연음과 상대적으로 더 많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것을 더 자연스럽게 여긴다는 점에서 사뭇 아이러니컬하게 보인다. 이를테면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이 “실제 현실(real reality)”을 대체한 셈인데, “그렇다면 과연 ‘참된 현실(true reality)’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샘솟는다.
--- p.74
대칭미의 배경에는 균형과 안정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필자는 미의식의 본질 중 하나는 “안락감”이라고 본다. 물론 “쾌감”이나 “행복감”이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감은 상통하지만 안락감이 더 기본적 관념이다. 생물이 치열한 생존경쟁이 난무하는 자연계에서 살아갈 때 우선 바라는 것은 생명의 위협이 배제된 안락함이며, 쾌감이나 행복감은 이보다 나중에 염원할 소망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생물은 양적 등분의 대칭성에서 안락감을 느끼는데, 우리의 얼굴과 몸이 좌우 대칭을 이루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예이고, 오각형의 별, 육각형의 눈 결정 등의 많은 예가 있다.
황금비는 양적 등분이 아니다. 하지만 “전체와 대분”의 비율이 “대분과 소분” “소분과 더 소분” ……으로, 크기는 달라져도 “비례는 균등”하게 유지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 값은 0.6180339887…인데 놀랍게도 역수를 취하면 1.6180339887…로 소수점 이하의 값이 똑같아서, 뒤집어도 균등한 비율이 유지된다(이 때문에 황금비를 “대분/1=0.618…”과 그 역수인 “1/대분=1.618…”의 2가지 값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이미 보았듯 고둥과 태풍과 은하가 자라나고 움직이는 모습 등에서 드러나며, 따라서 이는 역동적인 삶의 과정 속에 숨겨진 안정성인 것 같다. 그러므로 대칭과 황금비는 모두 균형이되 “대칭은 정적 균형, 황금비는 동적 균형의 표상”으로 간추릴 수 있고, 이게 바로 대칭과 황금비에서 유래하는 미의식의 정체라고 여겨진다.
--- p.82
아인슈타인은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을 굽어보면서, 모든 일들에 일일이 직접 관여한다고 보는 인격신의 관념에 거부감을 보여왔다. 특히 그는 이른바 자유의지의 가능성에 대한 논리적 모순을 들어 이를 비판한다. 전지전능의 신이 세상만사에 낱낱이 관여한다면 사람의 행동과 의식에 독자적인 책임을 추궁할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런데 확장해보면, 책임 추궁은 둘째치고, 애초에 아인슈타인이 인격신을 거부하는 것 자체부터 신의 의지이므로 의식의 자유마저 없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과 생물과 우주의 존재와 운행의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애초에 인격신을 상정할 때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신이 이루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랬던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자유의지는커녕 의식마저 없어서 아무것도 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를 바랐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그 수많은 애절한 간구의 기도는 무슨 소용인가? 이처럼 의식이 무의미하다면 생물도 무생물과 다를 바가 없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성서적 자부심도 환상에 불과하다. 과연 이러고도 인격신의 관념을 고집할 수 있을까?
--- p.128
언뜻 반증이란 게 사뭇 두렵고 따라서 기피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동안 애써 세운 이론 체계가 하릴없이 허물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진정한 과학자는 반증의 출현을 환영할 뿐 아니라 일부러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만일 기존 체계가 완벽하게 옳아서 아무런 반증도 나오지 않는다면 과학에 아무런 진화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에 반증이 없으면 오히려 죽음과 같다. 그러므로 반증은 과학의 성배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성배가 아득한 고대에 아득한 심연에 묻혀버린 “잃어버린 성배”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불타 죽고 남은 재 속에서 새로이 태어난다는 전설 속의 불사조처럼, 불타 허물어진 기존 체계들의 잿더미 속에서 영원토록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는 “불사조의 성배”라는 점이다.
--- p.140
연역은 이전의 귀납에 의지해야 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공중누각이나 신기루와 같은 허황한 공론에 빠질 수 있다는 심각한 약점을 지닌다. 이에 대한 옛날의 유명한 예로는 “바늘 끝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가 춤출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천사”라는 관념 또는 존재가 검증불능이므로 이에 대해 제기되는 다양한 견해들도 모두 공론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한편 근래의 흥미로운 예로는 교황무류설(papal infallibility)이 있다. 2013년 2월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 1927~)는 무려 598년 만에 처음으로 생전에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때문에 교황무류설이 큰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간단히 말하면 교황무류설은 교황의 교리 선언이 신의 권위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신학 원리이다. 하지만 교황이 사임하여 새 교황이 취임할 경우 옛 교황이 지녔던 무오류성은 어찌될까? 이에 대해 “한번 무오류성을 지닌 존재가 오류를 범하는 존재로 바뀔 수는 없다”라는 주장과 “무오류성은 새 교황만 지닌다”라는 주장이 대립한다.
--- p.171
인간의 지성으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달리 [아테네 학당]에는 아주 흥미로운 대조가 묘사되어 있다. 만일 이 자신감이 정말 옳다면 이들의 견해에 아무런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뜻 사이좋게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 두 사람의 오른손은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두 사람은 모두 연역의 궁극적 원천, 곧 만유의 근본적 본질이 존재한다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그게 이 세상과 동떨어진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오른손의 손가락을 곧추세워 이를 가리켰으며, 뒷날 사람들은 “Out there”라는 간결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표현으로 그의 생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와 달랐다. 그는 본질이 없는 존재란 무의미하다고 여겼고, 따라서 본질은 이 세상에서 만유와 함께 존재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오른손의 손바닥을 펴서 아래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 대한 간결하고도 호소력 있는 표현은 없다. 이에 필자는 플라톤에 대한 표현을 정반대로 옮겨 “In here”라고 나타냈다. 곧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유의 본질이 이 우주를 벗어난 “저기 밖에”가 아니라 만유들의 “여기 안에” 내재한다고 여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견해 중 어느 게 더 타당할까?
--- p.191
이 모든 논의의 귀결은 무엇일까? 이미 적시했다시피 환원과 종합은 혼연일체라는 것이다. 지금껏 누구나 환원을 성분으로 분해하여 보는 관점이라고만 여겼지만, 맹자의 말처럼 근본적인 원(元)을 찾고 그곳으로 돌아가(還) 종합하려는 관점으로 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실제로 “환원”이란 용어는 이 목적을 위해 가장 적절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환원론은 올바른 분석을 통해 성분들로 구조를 이해하고 관계들로 운행을 이해하려는 종합론”이라 새로 정의하고 무익한 논쟁을 끝내야 한다. 이처럼 환원론을 분석론과 종합론을 아우르는 총체적 방법론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근래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융화(융합?통섭?통합)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요컨대 환원주의는 본질적으로 분석과 종합을 아우르며, 따라서 “하나의” 방법론이 아니라 인간이 모든 학문에서 필연적으로 영위해야 하는 “유일한” 방법론이다.
--- p.215
그렇다면 종교와 철학과 과학의 위계는 어떻게 매겨져야 할까? 신학이 한창 득세했던 중세에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했는데, 근세에 철학이 득세하자 거꾸로 “신학은 철학의 시녀”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중세에서 근세에 걸쳐 과학은 아직 미약했기에 이 두 분야 모두에 대한 시녀였다고 하겠다. 하지만 오늘날은 어떨까? 아마 객관적 위세만 본다면 신학과 철학이 모두 과학의 시녀라고 말할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위에서 혼연일체와 순환과 융화라는 표현을 했다는 점과 함께 현대의 민주주의 정신을 감안할 때, 그리고 더 나아가 삼태극으로 상징되는 진정한 상호관계를 올바로 통찰한다면 이 세 분야는 서로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다시 지적하건대 이러한 융화는 전체적인 일관성이 전제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종교와 철학 분야가 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조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수많은 험로와 장애가 도사리고 있으리라는 점은 쉽게 예상된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이는 당위적으로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가능성을 검토해 볼 때 당연적이기도 하므로 모두 함께 많은 지혜를 모아 반드시 참된 융화를 이루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 p.243
이러한 구도의 궁극적 의의는 무엇일까? 이제 마무리에 즈음하여 다시 첫 부분에 썼던 “의식은 내연과 외연의 인터페이스”라는 문구로 돌아가 보자. 그러면 우리는 광대한 시공의 고리의 어느 한 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식을 활용하여 야누스처럼 온 우주를 안팎으로 관조하는 중간적 존재로 파악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사실 우주 속의 모든 존재에게 마찬가지이다. 다만 우리가 현재 아는 한 인간은 다른 만유들의 간절한 염원들이 가장 뛰어난 고차원의 의식으로 영롱하게 영글어 아름답게 피어난 영장이며, 이를 통해 우주의 만유를 대표하여 이 모두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하겠다. 곧 우리가 앎의 총체인 과학을 통해 찾고자 하는 구원의 목표는 우리를 의식적 존재로 내보낸 대우주의 진정한 의도를 헤아리는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에 비춰보면 의식의 탐구로 나아갈 당위성을 우리의 마음 속 깊은 내면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강렬한 욕구로 절실히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누차 강조했듯 그 목표가 반드시 앎의 끝이나 완결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궁극의 답을 얻는 게 아니라 영원토록 더욱 풍성한 앎과 그 올바른 운행의 세계로 나아가는 게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불사조처럼 거듭나는 과학의 성배이다.(140쪽 참조)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는 모든 앎이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하므로 지금껏 갈래지어졌던 모든 학문과 예술과 종교 등이 자연스럽게 포괄된다. 요컨대 이 모든 노력의 정화(精華)는 진정한 앎이며, 이를 통해 주어진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존재의 가장 드높은 광영을 언제나 새롭고 올바르게 구현해 가는 게 과학의 영원한 성배라고 하겠다.
---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