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어리 / 나는 시대마다 그 시대 특유의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학문적으로 규명되기 이전, 언어로 구체화되기 이전, 모두가 동감할 정도로 공공연해지기 이전부터, 시대의 감각은 이곳저곳에서 마치 징후처럼 나타난다. 동시대의 감각 역시 이미 여기저기 흔적을 남겨 두었다. 내가 그 흔적들을 제대로 추적했다면, 동시대적 감각은 덩어리적인 것이라 짐작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비위계적 관계를 지향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우리가 주변적이라 생각하던 것들을 내부로 흡수한다. 덩어리적 감각은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운동한다. 그렇다고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은 아니다. 덩어리적 감각은 선형적 감각이 능숙하게 만들어 내는 환영에는 관심이 없다. 덩어리적 감각은 이야기를 생산하지 않는다. 덩어리적 감각은 선형적 감각보다 강도 높은 독해를 요구한다.
--- p.31~32
선 / 음악은 선율에서 출발했다. 선율은 지금껏 음악에서 주인공으로 행세했고 실제로 그렇게 작동했다. 때때로 한 음악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율을 흐리며 동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덩어리적 음향은, 선율이 최근까지 음악사에서 누렸던 지위와 역할을 되돌아보게 한다. 분명 다수의 소리가 함께 울렸는데 하나의 선으로 들린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소리 사이에 부여된 위계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선율보다 하위 위계에서 작동하던 다른 것들에 관해 다시 생각했다. 전경화된 선율이 음악의 표면에서 주요한 임무를 수행했음은 사실이지만, 사실상 새로운 음악을 촉발해 온 수많은 계기는 오랜 시간 동안 선율 아래 가려져 있던 다른 것들이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 p.32~33
서사 / 서사란 무엇일까? 서사가 무엇이길래, 서사 없는 작품을 감상 중인 관객들이 서사를 찾지 못해 번뇌하고, 심지어 가끔은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찾아내고야 마는 것일까? 여기서의 서사는 원인과 결과, 혹은 인물의 감정, 혹은 이야기나 메시지에 가깝다. 서사의 사전적 의미는 ‘일련의 사건에 관한 기술’로 정리할 수 있으며, 이는 이야기보다는 조금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인다. 폴 리쾨르의 관점은 조금 더 유연하다. 리쾨르에게 서사란, 세계(prefiguration)에 관한 이해를 내적 규칙에 의해 조직화(configuration)하는 탐구며, 이것은 독자에 의해 재조직화(reconfiguration)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존재하지 않는 서사를 찾아내는 관객에게도, 가사도 이야기도 없이 형식과 번호로 이름 지어지는 절대 음악의 관념적 시간 구조 역시 서사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믿는 나에게도, 큰 의심을 남기지 않을 만큼 충분히 넓은 시각이다. (...) 서사란 결국 연쇄적으로 분화되는 층위와 각 층위의 구성체들이 맺는 유기적인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나 메시지와 같이 좁은 의미의 서사는 선에 가깝지만, 수직적 층위와 수평적 흐름 안에 조직되는 정보 관계와 같이 넓은 의미의 서사는 덩어리에 가깝다.
--- p.37~38
감상 / 시간 예술의 감상은 거대한 나선형으로 진행된다. 여러 번 감상하기가 불가능한 시간 예술 작품도 있지만, 가능만 하다면 시간 예술은 다수의 감상을 통해 보다 더 완결된 구조적 청취에 도달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독해를 마치고 작품을 다시 보고 들으면 이전에 감각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들이 감지된다. 새로운 정보는 기억과 독해를 수정한다. 다수의 감상을 통해 수많은 비동시가 동시로 중첩되기를 반복하는 동안, 감상은 회전하며 전진한다.
--- p.45
창작 / 시간 예술의 창작 또한 거대한 나선형으로 진행된다. 창작의 골자가 되는 사유는 수행의 반복으로 다듬어진다. 무언가를 이전과 똑같이 반복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복은 변화를 전제하고 그런 점에서 반복과 변화는 늘 한 몸이다. 따라서 반복은 태생적으로 동질 감각과 이질 감각을 중첩한다. 반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공통과 차이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과정이다. 형태가 바뀌는 반복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동안, 창작은 회전하며 전진한다.
--- p.45
푸코의 헤테로크로니는 시간 예술이 한시적으로 구축하는 시공간을 닮았다. 동시에 미술이 사유해 온 시간과 미술 안에서 내가 실험 중인 음악적 시간 사이의 간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미술은 20세기 이후 음악, 무용, 영화, 과학 등 다양한 타 장르를 흡수했고, 이와 함께 실질적인 시간, 즉 듀레이션이 자연스럽게 미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21세기의 나는 다원예술이라는 시류를 타고 작품을 창작하고 발표할 여러 기회를 얻었다. 그때마다 음악 연주(시간과 수행)를 모국어로 하여 내가 구사하는 시간 언어와 듀레이션 개념이 오랫동안 부재했던 미술이 시간을 재료로 받아들인 이후 주로 구사해 온 시간 언어 사이에서 대립하며 공존하는 이질적 태도를 감지한다. 이러한 헤테로크로니 안에서 나는 이 두 가지 이형적 시간 언어의 차이를 탐구 중이다.
--- p.58~59
나는 장르에 상관없이 동시대 수행자가 단련해야 하는 기술이란 계획(과거), 상황(현재), 결정(미래)을 ‘인식’하거나 이에 ‘반응’하는 기술이라 생각한다. 수행자가 (몰라야 하는 것을 포함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는 동시에 지금-여기에서 다시 무엇을 할지 결정할 때 발생하는 수행성이, 내가 연구 중인 수행성에 가깝다. 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표현과는 조금 다르다. 수행자는 무언가를 보여 주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상황에 반응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미세하면서도 유일하게 발생하는 즉각 반응(kinesthetic response), 이 즉각 반응을 촉발하는 장치로서 인식의 안과 밖을 횡단하는 경로를 안무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 p.70~71
선을 조직하는 방식 그리고 그렇게 조직된 결과로 발생하는 음향을, 음악에서는 ‘텍스처’라 부른다. 그 선이 하나인지, 여럿인지, 여럿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인지, 하나를 다른 여럿으로 표현하는지에 따라 각각 모노포니, 폴리포니, 호모포니, 헤테로포니로 칭한다. 하나의 선으로 시작한 음악은 다수의 선을 조직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며 선적 사고 체계를 정립했고, 그렇게 체계화된 선의 언어가 텍스처이다. 하지만 조성이 무너진 20세기 이후의 음악 실험에서 텍스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음향적 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선은 사라졌고 이미 희미해진 선의 흔적 사이를 부유하는 음향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음악에서 선 대신 덩어리가 들린다는 것은 음악이 더 이상 선이 아니라 덩어리로 사고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선으로 사고하지 않는 덩어리적 음향을 선형적 사고방식인 텍스처 개념으로 독해하는 것은 얼마큼 타당할까? 지각되는 현상과 사고의 체계가 충돌하는 현재의 곤란함을 비껴가기 위해, 나는 덩어리적 음향 현상에 관해 사유할 새로운 언어로서 ‘포스트텍스처’를 상정했다.
--- p.128~129
선의 소멸과 덩어리의 등장은 음악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닌 듯하다.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 특히 미술의 범주에서 만들어지는 영상 역시 20세기 이후 계속적으로 비선형의 기류와 맞닥뜨려 왔다. 단발적 정보를 발산하는 다양한 소셜 미디어, 혹은 링크를 타고 참조 지점으로 즉각 임의 이동하는 하이퍼텍스트, 혹은 리모컨 버튼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전환되는 텔레비전 채널, 혹은 누벨바그 영화에서 “무리수적으로 절단된” 장면들, 혹은 다다가, 초현실주의가, 절대주의 필름이 시도한 무빙 이미지 콜라주,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인지도 모르지만, 시작점이 어디든 비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은 이제 비교적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링크가 내러티브를 대체”했고, “디지털 네이티브의 관점에서 텍스트라는 형식은 점차 고루해지고” 있다. 내러티브가 선형적이라면 링크는 덩어리적이다. 언젠가 카타리나 그로세가 말했던 것처럼 텍스트가 선형적이라면 정보의 다발은 덩어리적이다.
--- p.129~130
내용 없는 형식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형식에 이미 내용이 집적되었기 때문이다. 미술의 형식은 형과 색에 한정되지 않는다. 형식은 더 넓은 의미에서 창작에 필요한 모든 재료이자 사유이고 결과이며, 역사에 축적된 지식이기도 하다. 특정 형식이 재료로 선택되고, 그 형식이 이룬 성취가 진지하게 탐구된 후 비판적 사유에 의해 적절히 부정되는 동시에 새로운 형식 실험으로 연결될 때, 형식은 곧 내용과 동일해진다. 이런 형식 실험에서, 형식의 명분이 될 혹은 형식이 복무할 별도의 내용은 필요하지 않다.
--- p.134
그렇다면 ‘노래’란 무엇인가? 여기서 노래는 사전적 의미의 노래를 지칭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노래의 의미와도 다르다. 노래는, 소통 지향적으로 정돈된 감각 정보의 위치, 방향, 질서를 의미한다. 반면 비(非)노래는, 관습을 벗어나는 새로운 관계로 연결된 감각 정보의 집합 양상 및 그 행동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의 ‘노래’와 ‘비노래’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운동 방향을 지시하는 것으로, 음악에 한정되지 않는 보다 보편적인 감각 언어를 지시한다. 그럼에도 이 두 언어를 굳이 노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유는, 이 두 언어의 이질적 운동성을 음악을 통해 처음으로 명확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해와 소통을 지향하는 노래와 이해와 소통을 지양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비노래는, 음악 안에서 늘 갈등하고 공존해 왔다. 음악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관념적으로 정량화하면서 시간을 가시화하려 했다. 즉 노래하기를 꿈꿨다. 노래는 가사, 리듬과 펄스, 어울림이라는 공통 감각을 전략으로 취한다. 동시에 음악은 새로운 기술과 사유로 인한 새로운 구조가 출현할 때마다 그 구조에 근거하여 기존의 노래 관습을 뒤집으며 낯선 방식으로 말하는 언어를 촉구했다. 즉 노래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비노래는 곧바로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생소한 소리와 생소한 운동성을 탐구하며 시간 감각과 어울림을 재정의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 p.135~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