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학교의 사진 수업에 참여했던 한 학생은 13년이 지나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 카메라를 사랑했습니다.” 짧고도 명료한 이 한마디는 ‘이것은 과연 예술 작업인가? 이 활동을 지속하도록 두는 것이 맞나?’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p.28 「김효나, 질문들」 중에서
바우차르는 이렇게 말한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사진을 찍느냐는 물음보다는 왜 그토록
이미지를 원하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그의 사진과 이야기는 시각장애인을 향한 상식에 도전하고 편견을 깨뜨린다. 그리고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볼 수 없다고 보고 싶은 욕망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p.39 「박지수, 볼 수 없다면, 아니 보고 싶다면」 중에서
영어 단어 ‘blind’는 보이지 않는다기(sightless)보다 혼란스럽다(confused)는 뜻으로 종종 쓰이기도 했다rh 한다. ‘blind’는 ‘흐릿하게 하다’, ‘속이다’, ‘기만하다’란 뜻의 원시 게르만어 ‘blindaz’에서 파생된 말이지만 ‘blindaz’를 이루는 원시 인도유럽어의 어근은 ‘bhel’로, 이 말에는 ‘빛나는’, ‘반짝이는’, ‘타오르는’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게 본다면 ‘blind’는 단순히 시각적 능력의 결손이 아니라 빛이 지나치게 주어진/초과된 상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눈먼’이라는 부재의 심연에 ‘빛’이란 존재가 있는 셈이다.
---p.68 「장혜령,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중에서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그것을 해석할 수 있기나 한 것인지는 큰 문제가 아니다. 시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주 적고 해석할 수 있는 정보는 더더욱 적어서, 결국 비장애인들도 어림짐작과 상상력으로 그 간격을 메꾼다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해 왔다. 즉 우리의 몸은 자신이 세계를 ‘보고’ 있다는 믿음에 갇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p.108 「김현호, 가엾은 우리 몸, 영혼 안에 갇혔네」 중에서
세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고유하다. 눈이 보이는 사람은 망막에 닿은 빛으로 사물과 공간을,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감각한다. 그런 것처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시점이 없다는 것’으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멀리 혹은 가까이 들려오는 소리와 울림, 진동, 공중에 퍼져나가는 냄새 입자, 피부에 닿는 온도와 압력, 접촉한 표면의 촉감과 맞닿은 몸의 위치 감각으로 축조된 세계는 사물의 표면에서 반사된 빛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한다.?
---p.195 「이민지, 무언가 시작되는 기분이 든다」 중에서
보르헤스는 유물론자가 아니고, 감각을 신봉하지도 않았다. 그는 시력이 떨어지기 전부터, 아니 아주 어릴 때부터 “사물과 현상을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글을 쓸 때 꿈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영어에 멋진 말이 있어요-꿈꾸며 시간을 보내는(dream away) 거예요.” 그는 꿈의 맞은편에 있다고
여겨진 것들, 현실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불신했다.
---p.222 「최원호, 정류장에서 하는 고민」 중에서
나와 타자 간의 수평적, 촉각적 접촉과 윤리를 주장하는 이리가레의 촉각의 존재론의 기반 위에서, 우리는 시각중심주의적인 점유와 통제, 침략, 폭력으로서의 권력적 시선이 아니라 평등한 접촉으로서의 새로운 시각인 촉각적 시각을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p.238 「유서연, 평면거울을 깨고 촉각적 오목거울로 보기」 중에서
진정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그의 유작이 바로 이러한 세계가 소멸하는 순간을 연출하면서 종결된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앙은 시선을 나무 쪽으로 두고 벤치에 앉아 있다. 그의 등 뒤로 쿠프레수스 루시타니카가 보이지 않는 이유다.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다프네라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나무 쪽에서 공원을 보게 된다. 밀로스가 그린 부부 루시타니카의 모습은 이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밀로스의 그림에는 공원이 보이지 않는다. 주앙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p.246 「유운성, 프랜시스 레알 공원」 중에서
그녀는 더는 경험할 수 없게 된 세월의 흐름을 다시 경험할수 있도록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다는 듯이, 집요하게 시간의 흐름을 정렬한다. 이때 그녀가 싸우는 적(敵)은사진이다. 사진은 기억할 것과 기억 속에서 억압되어야 할 것을 가리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기억의 대상으로 일괄 처분한다. 그렇기에 에르노가 보기에 “기억은 고갈되지 않는 것이 되었지만 시간의 깊이는 사라”진다. 그리고 그러한 “흔적의 증대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게” 만든다. 결국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무한한 현재 속에” 있는 셈이다.
---p.249 「서동진, 사진이라는 적(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