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혁은 그제야 불꽃이 꺼지지 않게 주의하느라고 정신없는 신이의 해사한 얼굴과, 그녀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얼굴만한 꽃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긴장감이 일시에 확 풀어져버렸다.
“안 무서우셨나 보군요.”
“네, 별로요.”
대답은 신이가 하고 있었지만 은혁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커다란 두 송이 꽃뿐이었다.
“그런데 임 대표님은 많이 무서우셨나 봐요? 어우, 많기도 하다. 한 사흘 정전돼도 임 대표님은 끄떡없으시겠어요.”
웃음을 참느라 은혁은 고개를 외로 꼬았다.
“고맙습니다. 어쨌든 잘 쓸게요.”
인사와 함께 신이가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꽃이 팔랑거리며 함께 인사를 건넸다. ‘네, 그러세요.’라는 간단한 인사를 건네는 것에도 은혁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신이가 돌아서고 그 뒤로 현관문을 닫자마자 그는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다.
저 여자, 틀림없이 모르고 있는 거다. 뭘 하다 왔는지는 몰라도, 모르니 저렇게 태연하게 행동하지 알면서는 진짜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죽어도 못할 짓이었다.
“어떻게 한번을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질 않냐. 큭큭, 다음번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질 지경…….”
그 순간, 불이 들어왔다.
원체 집을 밝게 해두었던 터라 다시 밝아진 집에 크게 위화감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훤한 불빛 아래 드러난 집 안의 광경이었다. 몇 배는 더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그림자를 잃은 채 흔들리는 촛불의 군무는 어쩐지 조금 초라하고 상처 입은 느낌을 연상시켰다. 마치 그의 어머니처럼.
아버지가 의처증과 편집증에 집요함까지 얹어서 어머니를 자살로 몰아가는 데는 몇 년의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것일 수도 있었다. 경찰관이라는 직업을 등에 업은 아버지는 어머니의 힘으로 어찌 해보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대였으니, 그렇게 하루하루 피를 말려가는 상대에게서 도망치는 최선의 방법이 죽음밖에 없었던 것일 수도.
그리고 그 날, 싸늘하게 식어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그 옆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기다리던 그 몇 시간 동안 어린 은혁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버지다. 그러니 반드시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리고 말겠노라고.
그러나 몇 년 후, 그의 아버지는 강도 사건을 수사하던 중 순직하고 말았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깊이 파인 채 굳어져가던 분노를 가슴에 담고 있던 은혁은 그나마 증오할 상대를 잃고 나자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계속 그 상태였다면 어떤 참혹한 꼴을 보게 되었을지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위태위태한 칼날 위를 걷고 있던 은혁을 맡게 된 사람이 다름 아닌 작은아버지였다.
아버지보다 다섯 살 아래였던 작은아버지는 일찌감치 장사 쪽에 눈을 떠서 제법 좋은 수완으로 작은 카센터를 탄탄한 중소기업으로까지 키워놓으셨다. 그러나 작은아버지 역시도 가정을 꾸리는 데는 소질이 없었고, 덕분에 쉰을 앞둔 나이가 되어서도 가까운 일가붙이라고는 은혁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시작된 두 남자의 동거생활은 받아본 적도 없고, 주어본 적도 없는 애정을 새삼스럽게 두 남자 모두에게 일깨워 주었다. 비록 그 과정이 말보다는 손이 먼저 나가는 지극히 폭력적인 관계이긴 했어도, 어쨌든 그 근간에 깔려 있는 것은 서로가 그토록 가지길 원했지만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던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은혁은 작은아버지의 애정 가득한 폭력 속에서 뿌리부터 부서져 새롭게 태어났다. 지금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임은혁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혁은 한 해, 두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아지는 자신을 거울 속에서 발견했고, 그것이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되고 말 거라는 두려움.
핏줄 속에 흐르는 그 더럽고 나쁜 피의 기억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를 망가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아무리 부정하고 싶다 한들, 피를 통째로 갈아서 넣고 싶다고 기원한들 달라질 리 없는 유전자 속에 배어 있는 절대악.
그것이 그를 두렵게 했고, 겁먹게 만들었다. 아무리 아버지를 닮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어도 은혁을 스쳐간 여자들은 끝내 곁을 내주지 않는 그 때문에 눈물지었고, 그 눈물이 은혁에게는 또다시 독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순간 맹세했다. 인생 속에 여자를 들이거나 눈물을 보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그저 친절하고 완벽한 타인의 위치에서 누구의 눈물에도 휘둘리지 않고, 누구의 눈물에도 책임질 필요 없이 그렇게 살겠다고.
그런데…….
어디선가 바람이 느껴지자 은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 열었는지 기억도 없는데 창이 열려 있었다. 더위 때문에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모양이다. 그사이로 스며들어온 밤바람이 가뜩이나 여리게 흔들리던 촛불들 몇 개를 기어이 꺼트리고 말았다.
사그라져 가는 촛불들을 보며 은혁은 이를 악물었다.
‘절대 누구도 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지금껏 그렇게 잘 막아왔는데!’
촛불 하나만을 켜놓은 채 버티고 있던 그의 가슴속에 어느 순간부터 구신이라는 저 당차고 엉뚱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러고는 밝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인 빛들을 마구 던져서 촛불을 까맣게 잊게 만들고 있었다. 너무 쉽게, 너무 간단히. 더구나 그를 더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워낙 얌체공 같은 여자인지라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짐작할 수조차 없고, 막을 방법 따윈 더더욱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아니야.’
은혁은 눈을 감았다. 여린 촛불의 흔들림도, 눈부신 형광등의 현란함도 모두 그의 시야에서 지워졌다.
‘저 여자가 더 이상 다가오게 두면 안 돼.’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