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허기진 듯한 눈동자와 전혀 낯선 사람처럼 습윤하고 어두운 시선. 자제력의 마지노선이 사라진 그의 눈빛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순간이었지만 한 줄기 두려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눈 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비단 성적인 굶주림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은 그의 저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언가였다. 신이는 문득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들고양이 같았다던 은혁의 말을 떠올랐다. ‘나도…… 저런 눈동자였던 걸까? 저렇게 헛헛하고 무언가 결핍된……?’ 동시에 또 하나의 깨달음도 머릿속을 스쳐갔다. ‘이 사람도…… 지독히 외로웠던 거로구나!’ 은혁에게도 무언가 상처가 있다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그저 대수롭지 않은 건가 보다고 생각해왔다.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이렇게 통제력을 잃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에. 그러나 지금 그의 눈빛 속에 드러난 본심은 그 역시도 그녀만큼이나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아파했노라고 고자질하고 있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 허기진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슬픈 애정결핍의 증거. 신이는 심호흡을 깊게 했다. 당장 그의 상처들을 들춰내며 그것들을 치유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도 있긴 있었다. 살짝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팔을 내밀어 은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까워진 거리 때문에 거칠게 질주하는 그의 심장 소리가 여실하게 들려왔다.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시킨 채, 그녀는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말을 꺼내놓기 위해 입술을 벌렸다. “은혁 씨…….” 신이는 자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움찔했다. 살짝 갈라진 채 낮고 허스키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조차 낯설고도 매혹적으로 들렸다. 공연히 마른 입술을 몇 번 깨문 그녀가 간신히 다시 용기를 내서 말했다. “사랑해요.” 일순간 은혁의 얼굴 위로 퍼져나간 행복감과 온기가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했다. 그 확연한 변화에 신이는 가슴이 찡해졌다. 자신이 그를 이 정도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한없이 받기만 했던 그와의 불균형한 관계에 수평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을 그녀는 지금 막 알아냈던 것이다. 다정하고 따듯한 모습으로 돌아온 은혁을 바라보며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열었다. “사랑해요.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은혁 씨를 사랑하게 돼버렸나 봐요.”
“사랑해요.” 그녀의 입에서 먼저 나온 고백.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 했던 키스와 포옹보다도 몇 배는 더 강한 자극으로 은혁에게 다가왔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랄까. 감동이 가슴까지 벅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도 사랑해요. 신이 씨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가끔은 내 자신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차마 끝내지 못한 말을 그는 목 안으로 삼켜 넣었다. 그 대신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는 신이의 정수리 위에 온 마음을 담아 입을 맞췄다. ‘너무 예쁘고, 너무 사랑스러운 나의 연인.’ 그의 집요한 키스로 발그레하게 부풀어 오른 그녀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은혁은 이를 악문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것을 다시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참아내느라 손끝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이 자신이 그나마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더 이상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으면 무엇으로도 자신을 멈출 수 없으리라. 자신이 구신이라는 여자를 많이 원한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이성이 날아갈 정도로 강한 소유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의 몸과 마음, 심지어는 움직이는 시선과 호흡 한 올까지도 모두 자신에게만 묶어두고 싶었다. 통제력을 잃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조차 무서워지려 했다. 그러니 지금, 이성 비슷한 것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나…… 받아들여줄래요?” 진지한 그의 질문에 신이가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이내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대신 그의 목을 감싸 안고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고마워요. 한 번 더 물어봐줘서. 덕분에 진짜로 확신이 생겼어요.” 촉촉하게 잠겨버린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감정을 드러내며 그의 귓가에 울렸다. “당신이에요. 내가 원하는 사람. 내가…… 당신 가질래요.” 명백한 OK사인, 완벽한 허락. 은혁의 입에서 환희에 찬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