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야. 정말 괴물이라고! 어떻게 한 달 만에 기록을 4초나 줄여? 수완아, 정말 대어야! 네 말대로 태하 군은 대어라고! 도 대회, 전국 아니 진짜로 내년엔 태하 군이 올림픽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수완아! 어허허허헝!”
‘아빠, 거기까지 상상하는 건 너무 일러. 이제 겨우 시합 하나인데 기대가 큰 만큼 인생이란 건 실패의 좌절도 너무 큰 법이잖아.’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수완은 입 속에서 도는 말을 꾹 삼켰다. 중기의 부스스한 장발이 그녀의 시야를 가려 권태하의 잘난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수완은 중기의 커다란 어깨에 얼굴을 꼭 묻고 기댔다. 중기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마냥, 자신이 키워온 꿈의 크기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설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며 기뻐했다. 그가 가진 한의 크기를 알기에 수완은 거세게 고동치는 중기의 심장박동을 어느 때보다 더 무겁게 느꼈다.
“허허허헝! 수완아, 수완아! 태하 군이, 태하 군이! 으허허허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울음 사이에 섞어 흘리며 중기가 온몸으로 울며 웃으며 들썩였다. 수완은 가만히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다시 한 번 태하의 모습을 확인했다. 인어와 눈이 마주쳤다. 태하가 씁쓸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그녀가 써 준 ‘Winner’라는 글자가 화인처럼 선명히 새겨진 것이 언뜻 보였다.
“아빠. 꼴사납다. 메인 코치가 이럼 오션 망신이야. 눈물 콧물 닦아. 아무리 기뻐도 무게는 지켜줘야지. 권태하 체면 생각해서라도.”
수완은 뜨겁고 차갑게, 일렁이고 흔들리며, 튕겨 올랐다 떨어져 내리는 내면에서 일어난 전쟁 같은 진동이, 파동이 버거워졌다. 여전히 태하의 시선을 의식하는 온몸이 뜨겁게 발열한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가 걸리려나, 하고 생각했던 게 감기가 아니었다. 이미 그때부터였다고 그녀 안에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중기를 달래며 다시 한 번 태하를 힐끔 훔쳐보니 인어는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다. 타이트한 수영 팬츠에 가려진 긴 다리가 사람들의 동선을 방해하고 있다는 자각도 않은 채 길게 뻗어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그대로 드러난 상반신은 연신 가쁜 호흡을 뱉어낸다.
그리고 저 수건 밑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이지만 실상 겪어보면 장난기 많은 인어가 아가미를 통해 체내의 불순물 섞인 호흡을 고르고 있다. 수완은 가슴이 선득해졌다. 홀렸다. 홀려버리고 말았다. 늘 못쓰겠다, 싹수없다 생각했던 인어 청년은 그녀를 향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거나, 불순한 추파를 던지거나, 하다못해 묘한 눈길 한번 준 적도 없는데 제멋대로 빠져들고 말았다.
수완은 반사적으로 선수들의 가족에게 배정되는 좌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쪽 입매를 곡선으로 휜 희애가 그녀의 뒤에 선 수행원에게 귓속말을 전해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나쁜 놈, 이렇게 잘나놓고서는 민숭민숭해서 볼 것도 없는 처녀 가슴에 불을 지를 건 뭐니.”
‘떡 줄 것도 아니면서 찔러볼 건 또 뭐니, 사람 가슴 설레게.’
안 넘어가서 다행인 게 아니었다. 이미 넘어갔는데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다. 수완은 달달거리고 덜그럭거리고 그것도 모자라 오한마저 일어 두 손을 교차해 양팔을 꽉 움켜쥐었다. 애초에 상대도 안 된다 생각했었고 우건의 이야기를 듣고는 급이 다르다는 걸 더욱 확실히 새겼다.
중기는 늘 말했었다. 고아인 중기와 교육자 집안의 자녀였던 엄마는 나이도 나이지만 배경적으로 차이가 많이 났었기에 도망치다시피 하여 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림을 꾸려 살았다. 수완이는 비슷한 사람 만나서 자신이 당한 설움 겪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언젠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질질 짜며 말했었다. 별 청승이다, 하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권태하의 수비 범위에 그녀가 여자일 리도 없겠지만 지금은 별 시답잖은 생각들마저 다 떠올라 얼음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이가 딱딱거리며 부딪친다.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함으로 차오른다. 큰일 났다. 오션컴퍼니 회장 아들이면 그녀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단감인데. 그녀에게는 땡감인 남자가 어울릴 텐데. 쳐다볼 엄두도 안 난다. 찔러볼 엄두도 안 난다. 속이 뭉그러진다.
“야, 여수완!”
휴식을 취하던 태하가 어느새 그녀의 앞까지 휘적휘적 걸어왔다. 그가 다짜고짜 양손을 들어올려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울컥하고 뭔가 치받는데 애써 꾹꾹 내리누르고 수완은 태하의 커다란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마주쳤다.
“너무 멋져서 반하겠더라, 권태하.”
진심이 반쯤 섞인 말을 꾸역꾸역 뱉어냈는데 태하가 살 떨리게 쪼갠다. 밤톨을 만난 후로 처음 보는, 아주 예쁜 얼굴이었다. 나쁜 놈. 그렇게 웃으면 땡감인 난 뭐가 되니.
“1등 못 해서 네가 제시한 것 중에 택일해야겠네.”
태하가 또다시 손잡이처럼 그녀의 머리통을 잡아 좌우로 흔든다. 전처럼 그 손을 뿌리칠 마음도 서지 않는다. 그가 흔드는 대로 똑같이 흔들리는 심장이다. 심장에 모터가 달려서 들들거리는데 멈출 기미가 없다. 문득 태하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둘 중에, 뭐 할까?”
‘못쓰겠다, 권태하. 처음부터 줍지를 말 것을.’
인어는 날았지만 말총은 바닥에 꺼꾸러졌다. 꺼꾸러진 말총은 패대기쳐질 뿐인 게 세상임을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찢기고 헝클어진 지느러미를 단단히 꿰매 새로 코팅한 인어는 훨훨 날아가려 한다.
수완은 저도 모르게 눈꼬리 끝으로 중기처럼 이슬을 매달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짜내 흰 이가 모두 드러나도록 히쭉 웃었다. 대답 대신 마냥 웃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태하가 또다시 살 떨리게 웃는다. 현역 때도 이렇게 웃은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다디단 감처럼 해사하게도 웃는다.
“반했냐?”
“응.”
수완은 장난처럼 대답했다. 그러나 그 작은 대답은 이미 중기와 작은 툭탁임을 벌이는 태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테다.
‘어떡하나, 너무 쓰리다. 처음부터 이렇게 쓰리면 나중에는 내장이 온통 헐어버릴 텐데 어떡하나.’
수완은 돌아서서 그녀가 나왔던 동쪽 입구의 긴 복도를 터덜터덜 걸었다.
인어는 날았지만 말총은 꺼꾸러졌다. 하늘로 날아간 인어는 다시는 뭍을 밟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