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살아 있는 게 뭔지 모르는 것처럼, 죽어서도 죽었다는 게 뭔지 모르는 것 같다. 사람들은 여기 와서도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내가 죽었다니, 그게 어떤 의미지?” 하면서 다닌다. 살아 있을 때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 하면서 다니고, 그에 관한 책도 쓰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이젠 그런 책을 쓰고 싶어도 못 쓰겠지만.
살아 있었을 때 나도 아빠한테 그런 질문을 하곤 했다. 그러면 아빠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아들. 죽으면 다 알게 돼.”
하지만 아빠가 틀렸다. 죽는다고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죽었지만, 멸종한 도도새 꼴이 돼버렸지만, 난 아직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장담한다. 죽으면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앞에 기다리는 건 엄청난 실망뿐이다.
--- pp.13-14
본론을 말하자면, 내가 집을 나와 자전거에 올라타고 문방구로 출발하기 몇 분 전, 누나와 대판 싸웠다. 누나가 나한테 펜을 빌려주지 않아서였다. 난 그럼 나도 내 용돈으로 펜을 사서 쓰겠다며 뛰쳐나갔다. 우리는 별것 아닌 걸로 고약하고 치사하고 골 때리게 싸웠다. 우리는 남매끼리 싸울 때 하는 온갖 고약하고 치사하고 골 때리는 말을 다 했다. 내뱉을 때는 진심이지만 사실은 진심이 아닌 말. 화나고 열 받았을 때 막 나오는 말. (…중략…)
그러자 누나는 이 멍청아, 해가 서쪽에서 떠봐라, 내가 그럴 일이 있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게 너도 진즉 네 펜을 사서 쓰지 그랬어, 속이 다 시원하다, 다신 네 못생긴 낯짝 보기 싫다고 했다. 난 문을 쾅 닫기 직전에 좋아, 두고 봐, 두고 봐! 누나 완전 싫어! 완전 짜증나! 이 집이고 가족이고 죄다 싫어! 다신 들어오기도 싫어! 가족 모두 다신 보기도 싫어!라고 했다. 누나는 그럼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난 후회할 거라고 했다. 에기 누나, 그런 말 한 걸 후회하게 될걸? 내가 죽어봐, 그땐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자 누나는 웃기지 마, 오히려 기쁠걸?, 그러니까 꺼져, 그리고 에기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난 문을 쾅 닫고 자전거를 타고 출발했다.
그리고 사고로 죽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와 있다. 난 죽었다. 완전히 죽었다. 내가 누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끔찍하고 고약한 말은 “내가 죽어봐, 그땐 후회하게 될걸?”이었다. 그리고 누나가 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끔찍하고 고약한 말은 “웃기지 마, 오히려 기쁠걸?”이었다.
--- pp.34-35
얘기가 너무 멀리 나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난 저승세계를 걸으며 이 모든 의미를 곱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잠깐이라도 돌아갔다 올 순 없을까? 시계를 살짝 돌려서 잠깐만 다시 살아날 수 없을까? 내 인생을 전부 돌려놓으라는 게 아니잖아. 마지막 10분만. 내가 누나한테 마지막으로 한 말을 바꿀 시간만, 마지막 말을 “누나, 잘 있어. 사랑해.” 또는 “싸울 때도 있었지만 누나는 정말 좋은 누나였어.” 같은 착한 말로 바꿀 시간만 있으면 된다. 착한 말까지도 안 바란다. 못된 말만 아니면 된다. 차라리 아무 말 안 하는 것도 괜찮다. 그 정도만 돼도 좋겠다. 그 끔찍한 말, “내가 죽어봐, 그땐 후회할게 될 걸?”만 아니면 된다.
--- pp.42-43
“근데 어디로 가는 건데? 설마 우리가― 돌아갈 수 있다는 거야?”
아서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당연하지.” 아서가 말한다. “원래는 그래선 안 돼. 하지만 갈 수는 있어. 일단 한 번 해보면 쉬워. 어서 와.”
난 일어선다. 하지만 계속 망설여진다. “출몰하러.” 아서는 그렇게 말했다. 난 딱히 출몰하고 싶진 않다. 출몰이라는 개념이 영 찝찝하다. 하지만 그래, 돌아가고는 싶다. 어쩌면. 그냥. 다들 나 없이 어떻게 지내나 보러. 그동안 세상에, 내가 알던 작은 세상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러.
하지만 여전히 망설여진다. 아서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갈 거면 빨리 와.” 아서가 말한다. “아니면 나 혼자 간다.”
하지만 아직도 결정이 안 선다.
“빨리, 해리! 뭐가 무서워서 그래? 넌 죽었어, 안 그래? 무슨 일이 더 생기겠어?”
“근데 아서, 만약 우리가 돌아가면― 내 말은― 우리가 거기 가면―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우린 유령인 거지?”
아서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곤 씨익 웃으며 실크해트를 뒤로 젖힌다. 모자가 기우뚱하면서 머리에서 떨어질 뻔한다.
“유령!” 아서가 말한다. “당연히 유령이지! 유령이 아니면 뭐겠냐? 어쨌거나 우린 죽었어, 안 그래?”
--- pp.47-48
난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대화하는 애들 사이에 서서 애들 눈을 깊이, 캐묻듯 들여다봤다. 바네사, 마이키, 팀, 클라이브. 얘들 중에 아직 내 생각을 하는 애가 있을까? 나를 기억하는 애가 있을까? 난 대놓고 물어봤다. 애들 귀에 대고 소리 지르고, 애들 얼굴에 대고 악을 썼다. “나야! 나라고! 해리가 돌아왔어. 너희들, 나 몰라? 나 기억 안 나? 너희들이 날 몰라봐?” 그러곤 이렇게 외쳤다. “내가 그립지 않냐?”
하지만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어리지만 160살 먹은 아서밖에 없었다. 아서가 실크해트를 눌러쓰고 교문 기둥 꼭대기 지구본 위에 앉아서, 얄밉도록 다정하고 동정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아서의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서의 동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친구들과 반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는 거였다. 나와 함께 놀고, 싸우고, 다투고, 생일파티에 가고, 놀러 다니던 아이들이 나를 알아보는 거였다. 나를 그리워하는 아이가 단 한 명도 없겠어? 겨우 몇 주 만에 다들 나를 까맣게 잊었을라고? 아직 내 생각을 하는 애가 한 명도 없겠어?
그런데 없는 것 같았다. 운동장에는 게임들이 이어졌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게임이 계속될 수만 있다면 누가 게임을 하느냐는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게임이 영원히 이어지기만 한다면.
오싹했다. 으스스했다. 소름이 끼쳤다. 유령은 나인데도.
--- pp.96-97
난 계속 갔다. 학교마다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리들이 아이들로 넘쳤다. 도시락 든 아이들, 책가방 멘 아이들, 교복 입은 아이들, 청바지에 운동화 신은 아이들.
내 유령 목구멍으로 유령 응어리가 올라왔다. 별안간 화나고 슬프고 억울하고 눈물 났다. 죽은 이후 처음으로 소리치고 악쓰고 펄펄 뛰고 절규하고 싶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불공평해! 내 인생 내놔! 난 고작 애였어. 애가 죽는 법이 어디 있어. 다 그 멍청한 트럭 탓이야. 내 탓이었다면 모를까, 내가 죽어 마땅했다면 모를까, 이건 진짜 불공평해!”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나? 나쁜 일을 당해도 싼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은 없다. 죽어 마땅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일들은 그냥 무작위로 일어나는 거다.
그래도 불공평해. 난 지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이들이 나를 온통 에워싸고, 나를 온통 통과해서 걸었다. 웃고 떠들고 까불면서, 어떤 애들은 싸우면서, 어떤 애들은 친구들과 얌전히 얘기하면서, 어떤 애들은 신나게 장난치면서.
난 다시 살아나고 싶었다.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말로 다 못 한다. 너무나, 너무나 살아 있고 싶었다. 나도 저 애들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 살아 있을 때 당연하게 생각했던 온갖 일상적인 것들, 하찮은 것들, 축구공을 찰 수 있는 능력, 감자 칩을 먹을 수 있는 능력, 그런 것들이 미치게 그리웠다.
--- pp.172-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