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동 김여사의 우울
김여사는 남편이 떠난 후 외아들 준상이를 끔찍이도 아껴 치과의사로 번듯이 키워놓았다. 그렇게 귀한 아들이라 평범한 여자랑 결혼하는 게 못마땅해 갈라놓았더니만 준상이는 그 뒤로 여자도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병에 걸려서 결혼도 자식 보기도 못할 몸이 되어버렸다. 낙심한 김여사는 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그때 갈라놓았던 여자가 꼬맹이를 데리고 다니는 걸 마주치고 쾌재를 부른다.
“아니, 저…… 죽을병은 아닙니다. 수술도 깨끗할 것이고요.”
의사 선생은 그저 쩔쩔매며 속시원히 말을 않았다. 먼저 입을 것은 준상이, 제 에미 가슴에 못 박는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준상이 그 놈이었다.
“이제 속 시원하시겠어요.”
“무슨 소리냐.”
“육 년 전에 그때, 제가 수영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어머니 뭐라고 하셨어요. 수영이랑 결혼하느니 마누라 자식 없이 혼자 살라고 하셨죠? 말씀대로 되었어요.”
김여사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만 끔뻑였다. 의사가 한숨을 쉬었다.
“강준상 선생이…… 암 자체는 어디 전이되지도 않고 깨끗하긴 한데…….”
“한데요?”
“좋지 못한 곳에 암이…….”
--- pp.13~14
나는 매문가가 되고 싶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작가 지망생이었다.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느라 처음에 글을 썼을 때 이후로 완성한 글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 재능을 믿으며 화려한 작가의 영광을 줄곧 꿈꿔왔다. 그러나 세상은 재능보다 인맥이 우선인 곳이라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나는 인맥을 만들기 위해 알려진 모든 방법을 짚어나간다.
그렇게 나는 꿈꾸곤 했다. 내 앞에 펼쳐진 진붉은 레드카펫을. 미모의 큐레이터들이 방송을 타는 것을 보거나, 홍대 근처에 교수나 작가들이 많이 찾아오는 커피집을 경영하는 예쁜 카페에 대해 여성지에서 읽을 때마다, 나는 그녀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작가가 되어서 그녀들 못지않은 미모를 뽐내며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함께 미술품을 고르는 내 모습을 눈에 선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때로는 레드카펫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도 초연한 얼굴로 서 있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범속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화려한 사람들이 재능을 칭찬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어설프게 작가의 천재성을 논하는, 그런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 pp.50~51
세콤, 지구를 지켜라
보통 사람들이 한번 올라가기도 힘든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교육청이 있다. 보안을 위해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는데, 장주사란 젊은이는 자진해서 자주 당직을 서다못해 겨울에는 거의 매일 교육청 당직실에서 보내다시피 한다. 하지만 너무 잠이 깊이 들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침까지 교육청은 꽁꽁 잠기고 만다. 심지어 외계인이 내려와 경보선을 잘못 건드려 온 동네에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도 장주사는 일어나지 않고, 세콤 김과장만 애꿎게 한밤중에 출동한다.
어쩌면 장주사는 아침에 다시 이 산을 기어오르기 싫어서 매번 당직을 자청해서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침마다 신문을 배달하는 아저씨도, 온 동네 신문을 다 돌리고 마지막으로 이교육청 차례가 되면 낡은 오토바이를 한 번 더 바라보며 기합을 넣어야 할 정도라면 말 다한 거죠.
그렇다는 것은요, 보안 회사 직원이라고 해서 딱히 다를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한밤중에 그 산비탈을 걸어서 올라가진 않겠지만.
“또 교육청이야?”
“그런가본데요. 지난번에도 과장인가 하는 아저씨가 달밤에 체조하고 있더니.”
“거기 뭐하는 데래.”
“교육청이라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거기 당직 서는 사람도 없어?”
“있어요. 빌어먹을 잠충이라 그렇지.”
--- pp.93~94
처형
제국의 후계자인 공주는 마법사단장이자 대후작인 스승에게서 도리와 마법을 배웠다. 황제인 어머니는 병약하고 황군인 아버지는 방약무도하고 욕심이 많은 자라 공주는 부모보다 스승과 그 아들에게 더 의지했다. 황제도 그래서인지 아버지와 스승을 공동섭정으로 내세웠으나, 황제의 붕어 후 황군은 야욕을 드러내 스승과 새 황제의 연을 조금씩 끊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라,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스승만큼 키가 자라버린 소년은, 더 이상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사로운 자리에 가까이 불러들여도, 키 크고 마른 등과 어른이 되어가는 옆얼굴만을 보였다. 결코 웃어주지도, 돌아보아주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처럼 손을 잡아주지도, 괜찮다고 어깨를 토닥여주지도 않았다. 너는 왕이고 나는 그 신하다. 그 사실을 그녀의 마음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새겨 넣으려는 듯이.
“아직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내 공주님. 더는 꿈꾸지 마세요. 그냥, 앞만 바라보세요. 바꿀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마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세요. 자정국 막내 왕자와 결혼하지 않을 길이 없나 궁리하지 마시고, 차라리 자정국 막내 왕자는 어떤 사람이냐고 제게 물으세요.”
소맷자락 너머로 보이는 긴 손가락을 만지고 싶었다. 찻잔을 쥐고 붓을 드는 그 손을 빼앗고 싶었다. 붙잡고 싶었다. 어느새 그녀는, 이제는 자유롭게 만나러 갈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스승을 닮아가는 소년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고 있다.
--- p.134쪽
다시 한 번 크리스마스
15년 전 지구 상공에 외계인의 우주선이 나타났다. 슈슬리사라는 종으로 불리는 그 외계인들은 엄청나게 발달한 문명을 바탕으로 지구의 개화를 도와주겠다고 할 뿐, 폭압적인 외계의 침략자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진화자궁을 통해 인류의 진화를 앞당기려고 하다가 새로 태어난 아기들에게 두려움을 느낀 지구인들이 여전히 자연출산을 하려고 하자 슈슬리사는 자연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끔찍한 벌을 내린다.
그날, 10년 전 그 참혹한 날 이후로. 그것은 내가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되, 현실과 싸울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아직도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은 찾지 못했지만,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예, 서약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대 안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셨으니 친히 그 일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처음에는 공포, 그다음은 도피였다. 의사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날.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그래, 아기들. 큰길을 사이에 끼고 마주 보는 증권사 건물과 병원 건물 사이로 줄줄이 매달려 있던 신생아들.
--- p.162
진흙피리새
진화자궁에서 아이를 낳는 시대에 자연출산으로 태어나 이사나라는 이름을 받은 소녀가 있다. 계속 보호자를 옮기다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수습 연구원으로서 지구에 와 있는 젊은 슈슬리사 마리가 이사나의 보호자가 된다. 이사나는 마리에게, 슈슬리사에게 인간이란 인간에게 개와 같은 것이 아닌가 묻는다. 마리는 상처받고 똑똑한 이 아이를 돌보며 사랑하게 되지만,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 장기출장으로 잠시 떨어졌던 때에 큰일이 일어난다.
“궁금한 게 있어요, 선생님.”
“응?”
“슈슬리사는 인간의 친구라고 하잖아요.”
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심지어는 이곳 교과서에도 적혀 있는 그 말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이건 ‘개는 인간의 친구’라는 말과는 다른 건가요?”
“뭐?”
“여긴 그런 말이 있어요. 개는 인간의 친구라고요.”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의 말은, 내가 생각하던 어떤 것을 제대로 건드렸다.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하지만 개와는 달리, 슈슬리사와 인간은 지성체인걸?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정말로 지성체니까 동등한가요?”
“물론 지성을 가진 존재들은 각기 발전 정도에 대한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인격적으로는 동등하지.”
“어째서요?”
“어째서라니.”
--- p.223
홍등의 골목
인천에서 신부님과 윤진 언니란 사람에게 의탁해서 살아가는 열다섯 살의 이사나는 구세주랍시고 찾아오는 자들이 영 못마땅하다. 슈슬리사 감독관인 시셸이 어느 날 친구를 성당에서 같이 지내게 해달라고 하는데, 찾아온 사비리키라는 외계인은 거대한 젤리처럼 생겨서 윤진 언니를 기겁하게 한다. 슈슬리사만큼 진화한 종족이며 사려 깊고 천진한 외계인이지만 사비리키는 그 겉모습 때문에 인천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안녕, 이사나.”
“뭐예요? 저 사람들 왜 저래요?”
“지난번에 이야기한 친구를 소개할게요. 인사해요. 사비리키, 이쪽은 이사나.”
시셸의 뒤를 따라 성당 앞마당으로 들어선 것은 높이가 1미터는 족히 넘을 법한 거대한 젤리였다. 탱글탱글하고 말갛고 반투명한데 햇살 아래 묘한 오렌지색을 띤 것이, 원뿔의 중간을 뚝 잘라 뒤집어놓은 모양의 떠먹는 과일 젤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 생물체는, 뒤쪽에 튀어나온 괄태충 같은 꼬리로 바닥을 밀며 시셸의 옆쪽으로 움직여 멈추었다. 그 탱탱하고 매끄러운 윗면에서 긴 더듬이 같은 것이 일어났다.
“만나서 반가워요.”
악수를 청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만져보면 무슨 느낌이 들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시셸도 옆에 있고,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어색하게 손을 내미는데, 등 뒤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 p.270
사비리키는 그날 밤, 해가 저물고 9시 뉴스가 시작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초과근무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연구를 하는 것은 열정의 상징일지는 몰라도 능률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연구소에서 회식 같은 것에 끌려갔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일이라면 늦는다고 말을 했을 테니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윤진 언니나 신부님께 사비리키를 마중 간다고 말하기가 괜히 부끄러워서, 요 앞 편의점에 간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가서 기다려볼까. 사비리키가 휴대폰을 들고 다니면 좋을 텐데, 그는 정신 산란해진다는 이유로 그런 것도 들고 다니지 않았다. 그런 것 없이도 시셸과는 연락할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구에 아직 알려져서는 안 되는 수준의 기술이라며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차라리 시셸에게 연락을 해볼까. 고민을 하면서 골목을 지나는데, 뭔가 골목 안쪽에 물컹한 쓰레기봉지 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 p.289
I Love You
진화자궁에서 태어난 2세대인 ‘나’는 자연출산으로 태어나 지금은 해군 연구장교로 있는 그녀 이사나를 계속해서 동경해왔다. 진화자궁에서 태어난 자기 세대와 자기 존재에 대해 깊은 경멸과 냉소를 품고 있는 나는 졸업 후 바로 진해로 와버리고, 이사나에 대해 캐고 다니다가 드디어 본인을 만나게 된다.
“그것 말고도, 재미있는 것들이 좀 있었어. 음, 예를 들면 이거.”
술이 오른 대위 하나가 품에서 약 상자 같은 것을 꺼냈다. 서로 색이 다른 열 개의 알약이 개별포장된 블리스터 팩을 흔들어 보이며, 그녀는 빙긋 웃었다.
“이거 하나면 회식 끝!”
“숙취해소용인가요?”
“그 반대야. 이거 한 팩이면 일개중대 백 명이 마시고도 열두 병은 남을 만큼 술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 이거 봐, 보라색은 와인, 갈색은 맥주, 흰색은 보드카.”
“세상에, 술집들 다 망하게 하자는 거예요?”
“아니. 하지만 배 위에서도 가끔은 축하할 일이 생기거든. 그때마다 술을 들고 다니면 아까우니까. 배에 싣는 건 여튼 무게가 돈이고, 무게가 기동력에 반비례하는 건데.”
“이거 꼭, 그거 같네요.”
“그거?”
“어…… ‘바이블’에 나오는 것요, 예수의 기적.”
“아아.”
“물 위를 걷기도 하고, 물을 포도주로 바꾸기도 하고.”
“아아, 그런 이야기 많이 하지. 그런데 사실은 말이야.”
--- p.328
레퍼런스
권진웅은 천재적인 재능은 없지만 하나의 명제를 풀고 싶다는 열망과 성실만으로 수학과 대학원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슈슬리사라는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외계인들이 지구로 내려오자, 풀리지 않은 수학적 미해결 명제란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이 된다. 썰물처럼 사람이 빠져나간 연구실에서 진웅은 지구의 수학과 슈슬리사의 수학 사이를 비교하는 연구를 한다는 ‘신’이라는 외계인을 만난다.
찬란한 빛. 진리에 대한 희망. 언젠가는 그 희망이, 빛이, 이 손에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대학교 1학년, 아직 가슴에 패기가 끓어오르던 시절에는.
-내가 대학원 들어갔을 때, 난 내 손으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해결할 거라고 자신을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술 먹은 다음 날 아침에 학교에 출근했더니 교수님께서 신문을 보고 계시는 거야. 어지간해선 신문 같은 것 안 보시는 분이었는데.
학부에 입학했을 때 들었던 젊은 교수님의 이야기가, 그대로 머릿속에 복기되듯 떠올랐다. 젊었던 교수님에게는 절망이었던, 그러나 진웅에게는 희망의 상징처럼 머릿속에 새겨진 그 이야기가.
--- p.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