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이나 미정, 두 사람 모두 그들이 느끼기 시작한 낯설지만 기분 좋은 감정이 굳이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미정에게 있어 정현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보통의 여자라면 응당 느껴야 할 이성을 향한 두근거림과 세상의 비틀림 속에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은 한 인간에 대한 단순한 호감, 그리고 그를 통해서라면 왠지 그녀 자신도 쌀쌀하기만 하던 세상에 다가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더한 아픔과 상처를 가진 사람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조차 거부하던 자신과는 달리 그것을 꺼내 보이고 털어 낼 준비가 되어 있을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이방인에서 막 벗어난 사람들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저 상처를 가졌다는 동지 의식이 아닌, 다른 성(性)을 가진 남자와 여자로서 마주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그녀였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던 정현의 손길에서 미정은 단순히 지훈이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로 가장 먼저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여자로서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역시 지훈이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런 삶의 의욕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암울한 나날을 보내던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정현이 지금 느끼는 미정을 향한 감정은 그저 단순히 새로운 삶을 살려는 그에게 닥친 최초의 본능적인 감정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미정은 다시 한 번 부딪혀 보고 싶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 자신과 아들의 주위로 쌓아올렸던 높고 두꺼운 벽을 허물고 김정현이란 사내를 자신의 인생 안으로 불러들이고 싶었다. 오래전 아이의 아버지가 남긴 세상을 향한 불신이 정현으로 인해 더욱 커지게 되더라도 상관없이 미정은 지금 이 순간 지훈이를 키워 오는 동안 잊고 지내던 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다시 한 번 살아보고픈 꿈을 꾸는 것이었다.
지훈이가 가져다준 삶을 향한 애틋함은 늪에서 허우적대던 정현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고, 일단 밖으로 나온 그는 다시는 예전과 같은 암울함 속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버둥댔다. 눈동자 속에 별을 담고 있는 지훈이 녀석이 자신을 늪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면, 미정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 늪에서 멀어지게끔 유도하는 존재였다. 자신과 똑같이, 세상과의 어떠한 접촉도 불허한 채 수렁에 빠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여자. 어린 지훈이 정현에게 그랬듯, 그는 미정을 향해 손을 내밀어 붙잡고 싶었다. 예전에는 분명 그녀의 안에 살아 움직였을 삶을 향한 강한 열정을 정현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오직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로 아빠 없는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었을 만큼 강하고 열정적인 그녀의 본모습을 끌어내고 싶은 이유일지도 몰랐다. 아니라면,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지훈이를 낳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정현은 미정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달 전의 자신이 그러했듯,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미정이 흐느끼며 쏟아 냈던 삶에 대한 열망의 고백은 정현으로 하여금 오롯이 다시 찾은 삶에 전념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수미와 나누었던 평범하고 편안한 일상들을 지훈이와 그리고 그 아이만큼 사랑을 주고 싶은 아이의 엄마와 나누고 싶은 것이 정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정현은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뛰고 난 뒤 챙겨 온 생활정보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요란스레 울려 대는 전화기를 들어 올린 정현이 아직 이른 시간의 전화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 형? 나야, 상현이.
두 살 아래의 동생 상현이었다. 상현은 오는 10월에 3년간 연애한 같은 회사 아가씨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으로, 요즘 들어 녀석의 얼굴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힘든 일이었다.
“어? 네가 웬일이냐? 이 시간에 전화를 다하고.”
- 흠.
무엇인가 떨떠름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뜸을 들이는 상현에게 정현은 의아스러운 듯 되물었다.
“뭔데? 무슨 얘긴데? 결혼 문제야?”
- 아니. 나, 어제 에버랜드에서 형 봤어. 그 아기랑 아기 엄마도.
“…….”
공휴일이면 으레 그렇듯 연인과 놀러 간 놀이 공원에서 형과 생면부지의 모자를 발견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가슴속에 새기며 상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형을 불렀다.
- 형?
“어, 그래.”
- 지금 만나는 사람이야?
“으응, 그래.”
왜 선뜻 자신 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정현은 자문했다. 예상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던 대답을 하는 형에게 상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형! 왜 이래? 형 홀아비 됐다고 애 딸린 여자 맞아야 할 만큼 추락한 거 아냐. 나이도 젊고, 형 정도면 얼마든지 괜찮은 조건의 여자 만나서 새 출발 할 수 있어.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거친 숨을 몰아쉰 정현은 수화기 너머의 동생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뭐? 내가 얼마나 잘난 놈인데? 나 홀아비고, 그 여자 애 딸린 미혼모야. 이렇게 잘 어울리는 그림이 어디 있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 무슨 소리 하자는 게 아니야. 진짜 그 여자 좋아해? 그 아기까지 형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여자 좋아하냐고.
“모르면 가만이나 있어. 나, 그 녀석 때문에 이렇게라도 빛 보고 사는 거야.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나 어땠었니? 수미 따라 나도 죽었었잖아. 너, 기억 못 해?”
상현은 지난 4년간 형이 어떤 생활을 해 왔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정현이 쏟아 내는 말에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단지 핏줄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살 수 있었던 자신의 형이 아이 딸린 여자와 재결합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발 심리가 솟구쳐 오른 것뿐이었다. 상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 밖으로 얼마나 밝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와 고통 뒤에도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키워 가는지 관심조차 없던 형이 다시금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상현은 이미 그 생면부지의 모자를 가슴속으로 인정해야 했는지도 몰랐다.
- 그래, 알았어. 나야 형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부모님은 어떻게 할 거야? 엄마가 받아들이실 수 있을까? 완고하신 아버지는 어떻고. 형, 장남이잖아. 아이는? 그 애가 우리 집 장손 되는 거, 엄마 아버지가 받아들이실 수 있겠어?
정현은 다시금 갑갑해져 오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한참이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혼 얘기 할 정도로 진전된 사이 아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엄마 아버지는 내가 설득시킬 거야. 나, 아무것도 아닌 놈이야. 근데 그 여잔 혼자서 그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 키울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여자야. 나에게 과분할 만큼.”
정현의 말에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던 상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어쨌든, 고맙다. 형! 다시 살겠다는 마음을 품어줘서. 나 이렇게 닭살스러운 말, 평생 해 본 적 없지만 형만 마음잡고 예전처럼 돌아온다면, 그 여자, 형수가 아니라 신으로도 모실 수 있어. 진심이야.
사람처럼 살지 못했던 지난 4년 동안 죽을 것 같은 괴로움에 시달린 사람은 정현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지켜보던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그를 아끼던 모든 사람들이 지난 4년간의 고통을 고스란히 함께 느껴 온 것이었다. 정현은 시큰거리는 콧잔등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힘겹게 참아 냈다.
“네 맘 다 알아, 인마. 이만 끊자.”
지독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가까스로 통화를 끝낸 정현은 결국 소리 내어 울었다. 수미가 죽은 후에는 그녀와 아이를 잃고 혼자 남은 자신을 향한 연민과 슬픔으로, 이제 다시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후엔 죽은 사람처럼 지내던 동안 그에게 들킬세라 속으로만 울어 주었던 가족들에 대한 애틋함으로 정현은 눈물지을 수밖에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손등으로 훔쳐 낸 뒤 정현은 바로 마주 보이는 결혼사진을 향해 걸어갔다. 웃고 있는 수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정현이 속삭였다.
“절대로, 절대로 너 안 지워. 지우는 거 아니야. 알지?”
정현은 결심한 듯 또다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떼어 냈다.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고, 그저 가슴 한편에 묻어 두는 거라고 정현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언제든 그리워질 때마다 꺼내 볼 수 있게 정현은 고급 액자에 걸린 사진을 옷장 깊숙이 넣어 두었다. 수미를 향한 한결같은 사랑은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삶을 다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임을 정현은 알고 있었다.
몇 주째 세 사람의 데이트는 이어졌다. 데이트라고 해봤자 피곤에 지친 미정과 이제는 하루 종일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지훈을 데리고 한강 고수부지로 가 시원한 강바람을 쐬며 음료수를 마시는 것이 전부였지만, 정현에게나 미정에게나 그 여유롭고 따뜻한 시간은 세상 어떤 것보다 더욱 기다려지는 시간임에 틀림없었다. 놀이 공원에서 부럽게 바라보았던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연출하며 잘 자란 잔디 위를 걸어 보기도 하고, 한강이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가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그 흔한 키스 한 번 못해 볼 정도로 숫기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연인으로서의 강렬한 욕망 같은 것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두 사람 모두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점점 더 익숙해져 가고 있음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데이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 자리 잡아갔다. 외출을 하지 않는 날이면 정현은 놀이방에서 아이를 데려와 함께 미정을 마중 나갔다가 그녀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오붓한 한때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정현은 미정의 일이었던 지훈이의 한글 공부를 봐 주고, 식사가 끝난 후엔 가볍게 동네를 산책하거나 과일 디저트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다. 한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 세 사람은 이미 완전한 가족이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