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를 결정할 때 심사숙고하고 또 심사숙고한다. 그리고 지금 일생일대의 결정을 해야 할 상황에 봉착해 있다. 심사숙고로는 어림없는…….
“병원 문제가 아니면 무슨 일인데?”
강우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그에게 병원 말고는 문제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얼굴이다. 그랬으니 주혁을 불렀겠지. ‘조언이 필요하다’는 그의 전화를 받자마자 저 하나보단 주혁과 둘이서 돕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하고 말이다.
마침 가까이 처가에 있던 주혁은 한달음에 달려왔을 테고. 벌써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그를 병원장 자리에 데려다 앉힐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끝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끈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들이니까. 그는 더 멀리 가기 전에 친구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주기로 했다.
“여자 문제다.”
그의 거두절미한 말에 두 녀석의 반응은 똑같았다. 움직임을 딱 멈추고 동작 그만 상태가 되어 눈만 끔벅인다. 그런 두 친구를 번갈아 보던 재섭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자 주술이 풀린 듯 두 녀석의 움직임도 되살아났다. 늘어져 있던 주혁은 몸을 바로 했고, 강우는 꼿꼿하게 어깨를 세우고 앉았다.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는 듯 녀석들의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병원 문제보다 여자 문제가 더 흥미로운 게 분명한 얼굴들이다.
“여자라…….”
강우가 속내를 뚫어보고도 남을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끝을 흐린다. 엊그제만 해도 결혼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그가 며칠 만에 여자 문제를 달고 제 발로 찾아왔으니 헷갈리기도 할 것이다.
강우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거둬들인 재섭은 그때까지도 들고만 있던 잔을 코끝으로 가져가 길게 향을 음미한 후 짧게 한 모금 들이켰다. 시큼한 첫맛이 혀와 입 안을 간질이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든다. 다시 잔을 기울여 한 모금 더 목 안으로 흘려보냈다. 시큼했던 첫맛과는 달리 혀끝에 단맛이 남는다.
민들레 같다. 그렇다. 술 중에서 그가 그나마 유일하게 즐기는 와인이 민들레를 연상시킨다. 담그는 방법이나 시기에 따라 맛이 달라, 음미를 해보기 전까진 맛을 알 수 없는 와인 같은 여자가 바로 민들레다. 첫인상으론 속을 알 수 없고, 상황에 따라 겪을 때마다 그 매력이 달라지는 민들레가 바로 와인이다. 아까만 해도 그렇다.
「욕망이요. 내가 한재섭 씨에게 느끼는 건, 욕망이래요.」
그녀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튀어나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
그에 대한 감정이 뭔지 알려 달라고 조를 때만 해도 그가 기대한 대답은 ‘좋아해요’, 정도였다. 그랬다. 그는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빈말은 안 한다’고 했으니, 그녀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건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런 계산에 그는 되돌려줄 대답까지 미리 준비했다. 좋아한다고……, 그 역시 좋아한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나도 민들레, 당신을 좋아해요’,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그는 기회가 생기자마자 냅다 도망을 쳤다. 길거리에 그녀를 세워 둔 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쳐 버린 것이다. 용기를 보여준 민들레에 비해 그는 겁쟁이였다. 모르긴 해도 그런 소리를 해 놓고 민망했을 텐데…….
그렇게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처음인데, 처음으로 그를 고민하게 만들고 오랜 세월 고집했던 가치관까지 버릴 수 있게 만든 여자인데.
‘처음이라…….’
그러고 보니, 그에게 있어 민들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처음’이란 수식어가 붙은 여자다. 처음으로 그의 호기심을 유발시킨 여자였고, 처음으로 관심이 생겨 버린 여자였으며, 그래서 처음으로 관심이 받고 싶은 여자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좋아하게 되어버린 여자다. 그가 좋아하게 되어버렸으니, 그녀 또한 그를 좋아해주길 바라게 된 첫 여자…….
아무래도 해야겠다. 결혼.
뭘 해도 민들레가 떠오르고, 뭘 먹어도 민들레가 생각나는 걸 보면 심사숙고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조언을 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결혼부터 해야겠다. 하고 보는 거다. 욕망을 느낀다니, 결혼부터 하고 그를 안게 해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맘껏 가지라고 해줘야겠다. 할아버지께서도 살아생전 말씀하셨잖은가? 때론 본능을 따르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 되기도 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무덤 속에 드러누운 것 같은 생활이 더는 싫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똑같은, 지루하고 헛헛한 삶이 더는 싫다. 적막강산인 집도 싫고, 혼자 먹는 밥은 더 싫다.
민들레다. 민들레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놀려도 할 수 없다고 여긴 그의 주량에 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고 꿀물을 내밀며 볼을 붉히던 민들레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녀가 그를 책임져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녀가 그의 외로움을 책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 결혼해야겠다.”
“뭘 해?”
강우가 확인하듯 물었다.
“결혼, 해야겠다.”
선언하듯 대답하는 그의 어조가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와우!”
주혁이 환호성 비슷한 소리를 내지르며 건배를 하자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얼떨결에 덩달아 잔을 치켜들어 보이고 입으로 가져가 남아 있던 와인을 단번에 쭉 들이켜고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재섭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강우와 주혁이 ‘흥미진진’이라고 쓰인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재섭은 서둘러 등을 돌리는 것으로 두 녀석의 표정을 외면했다.
“그 사람한테 가야겠다. 당장.”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