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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과 만변 거젠슝, 중국사를 말하다

불변과 만변 거젠슝, 중국사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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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52쪽 | 666g | 152*225*28mm
ISBN13 9791190429269
ISBN10 119042926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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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는 오랜 시간 써왔지만 전혀 현실이 되지 않은 몇 가지 개념이 있는데 아주 유명한 ‘구주(九州)’도 그중 하나다. 유가 경전에 근거한 ‘구주’가 현재 통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 우 임금이 치수에 성공한 뒤 천하를 아홉 주로 나누어 통치에 편리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 사료와 고고학적 발견에 근거하여 분석해보면 우 임금이나 그 시대에 ‘구주’가 있었다고 실증할 방법이 없다. 설령 확실하게 존재했다 하더라도 그 시대의 통치자는 그렇게 큰 땅을 직접 통치하거나 관리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구주’는 어떤 이념이 반영된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 p.18

이 범위가 최대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렇게 정했는가? 그렇지 않다. 청나라가 최후에 통일한 강역은 중국 역대 왕조에 비해 확실히 컸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나 부분적으로 보나 청나라보다 더 컸던 왕조는 당나라였다. 당나라 서쪽 끝은 아랄해 연안까지 도달했으므로 청나라 서쪽 경계보다 훨씬 멀었다. 또 예를 들어 한나라 강역에는 오늘날 베트남의 대부분, 한반도 북부와 중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청나라 강역을 선정하면서 탄 선생이 다음과 같이 지적 했다. “한편으로 이 강역은 중국 몇천 년 역사 발전에 의해 형성되었지만 결코 최대는 아니며, 다른 한편으로 역사상 몇몇 왕조는 통제한 범위가 청나라보다 크기는 했지만 자신의 통치 범위 안에서 유효한 행정 관리를 실행한 것은 오직 청나라뿐이었다.”
--- p.30

전한 초기에는 항상 “봉화가 감천궁(甘泉宮, 산시陝西 춘화현淳化縣 간첸산甘泉山)을 비췄”으므로, 바로 감천궁 일대에 늘 봉화가 오르며 경보가 전해졌다. 흉노족 기병이 남하할 때는 장안에서 겨우 800리 정도까지 접근했고, 이는 기병의 속도로 하루 밤낮이면 바로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안은 도성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주위 방어 역량을 강화했고 아울러 시종일관 북쪽과 서북쪽 변방을 굳게 지켰다. 국력이 강성할 때는 이곳에서 거병해 바로 반격 할 수 있었다. 한 무제 시대에는 흉노를 한나라 경계 밖으로 축출하고 진나라 장성을 잇는 경계선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중을 기지로 서북을 개척해 하서주랑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사실이 증명한 바와 같이 장안을 수도로 삼은 유방의 선택은 대외적으로 적을 방어하는 측면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 p.52

전한 시대에 어떤 사람이 계산해본 결과 진시황 때는 식량을 오늘날의 산둥 지방에서 오르도스 지방, 즉 새로 개척한 주요 군사 주둔지 및 장성 수축 지역까지 운송해야 했는데, 당시 식량 운송 효율이 겨우 6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산둥에서 식량 60석을 운반한다고 가정할 경우 오르도스 지방에 도착하면 겨우 1석만 남는다는 결론이다. 나머지 59석은 어디로 갈까? 그중 절반은 길에서 먹어야 한다. 사병도 먹어야 하고 운반 가축이 있을 경우 가축도 사료를 먹어야 한다. 식량이나 사료를 연도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가축이 길에서 죽거나 도망친다면 식량을 운반할 방법이 없으므로 사람이 주로 등짐을 져서 날라야 한다. 또한 남은 절반도 목적지에 전부 남겨놓을 수 없다. 운반병이 돌아올 때도 식량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장졸 30만 명이 오르도스 장성 주변에 주둔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식량 운송을 책임져야 했을까?
--- p.86

이 이주의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나라 말기가 최초인데, 당시 서수휘(徐壽輝, 1320~1360)가 마성 일대에서 반원(反元) 군사를 일으켰고 나중에 서수휘의 부하가 당시 사천(四川)으로 들어갔으며 명옥진(明玉珍, 1329~1366)이 중경(重慶)에서 정권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사람이 이들 군사를 따라 호광(湖廣, 호북湖北과 호남湖南을 나누기 이전 명칭)에서 사천으로 이주했다. 명나라 전체 역사 기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사람들이 호광에서 사천으로 이주했다. 그 이전에는 강서(江西) 사람들이 대규모로 호광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역대로 “강서 사람들이 호광을 채웠고 호광 사람들이 사천을 채웠다(江西塡湖廣, 湖廣塡四川)”는 말이 유행했다. 청나라 초기에 이르러서 또 다시 “호광 사람들이 대규모로 사천을 채우는” 이주 활동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당시의 운남, 귀주, 섬서 남쪽으로 이주가 계속 이어졌다.
--- p.126

또한 송나라 이후 원나라를 포함해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정절 관념은 갈수록 더 널리 퍼졌고 갈수록 더 강하게 굳어졌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각지에 ‘절부(節婦)’와 ‘열녀(烈女)’를 대대적으로 표창하기 위해 열녀문[貞節牌坊]을 세웠다. 그녀들의 ‘주요 행적’은 흔히 개가를 완강히 거부했거나 죽음으로 저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개가를 강요하는 힘에 저항하기 위해 어떤 여인은 자살했고, 어떤 여인은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어떤 여인은 귀를 자르기도 했다. 또는 청상과부로 끝까지 수절했거나 약혼자가 죽었지만 절개를 지켰거나 유복자(遺腹子)를 길러 성인으로 성장시키면서 노년을 맞은 일도 있다. 이러한 행적은 각종 기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지방지나 족보에도 「절부전(節婦傳)」이 있다. 수많은 현이나 현 이하 시골 마을에서도 절부를 위해 세운 패방(牌坊)을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 p.179~180

마찬가지로 공자에 의해 ‘양사(良史, 우수한 사관)’로 찬양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사실대로 역사를 기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필법이 공자가 옹호하는 가치관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관 동호(董狐, ?~?)는 “조돈(趙盾, 기원전 655~기원전 601)이 자기 임금을 시해했다(趙盾弑其君)”라고 기록했지만, 사실 피살된 진 영공(晉靈公, 기원전 624~기원전 607)은 혼군(昏君)에다 폭군이었다. 조돈이 여러 번 폭정을 막으려고 간언을 올리자 원한을 품고 자객을 보내 조돈을 죽이려 했지만 미수에 그쳤고 이에 조돈은 어쩔 수 없이 도주하게 되었다. 이런 사이에 진 영공이 피살된 것 이다. 조돈은 일찍이 동호에게 자신을 시해범으로 기록한 이유를 추궁했다. 동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즉 “도망치면서 국경을 나가지 않은” 것, “돌아와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은” 것이 이유였다. 그러자 조돈은 그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공자도 조돈을 훌륭한 대부[良大夫]로 칭했고 그가 도망가면서도 국경 밖으로 나가지 않아 오명을 쓰게 되었다고 애석해 했지만, 동호가 이 일로 ‘시해’의 가치관을 규정한 것은 충분히 긍정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일심으로 옹호하려 했던 ‘예(禮)’였다.
--- p.205

당시에 또 한 명의 대신이던 육가(陸賈, 기원전 240?~기원전 170)는 새로 건국한 한나라를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하려면 유방에게 치국의 도리를 알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항상 유방의 면전에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을 인용했다. 유방은 심하게 염증을 느끼다가 어느 날 소리를 질렀다. “이 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시경』·『서경』에만 의지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육가가 반문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한 바탕 중요한 이치를 설파해 유방의 말문을 막았다. 유방은 불쾌한 가운데서도 죄책감을 느끼며 육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험 삼아 짐을 위해 진나라가 천하를 잃을 까닭과 짐이 천하를 얻은 까닭 그리고 고대 각국이 드러낸 승패의 교훈과 경험을 좀 써주시오.”
--- p.270

자사부의 효과는 뚜렷했다. 본래 지방관의 행위는 그들 스스로 상부에 보고할 때 자신도 모르게 약점을 노출하거나 그들이 보고한 자료에서 모순을 노정하거나 허점을 드러낼 때를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진상을 알 수 없었으며 더더욱 조사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정보 전달이 상당히 어려워서, 특히 지방관과 토호의 실제 상황을 조정이나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 단위 관리의 부하나 현지 민중이 조정에 보고할 가능성은 0퍼센트에 가까웠고, 설령 그들이 충분한 재력을 보유해 장거리 여행 경비를 감당할 수 있더라도 합법적으로 현지를 떠나 장안으로 들어가려면 지방관의 비준을 받아야 했다.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군 단위 관리가 직접 조정에 보고해서 성공한 사례는 지극히 드물었는데, 일반적으로 조정에서 그와 같은 수요가 있을 때에야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 p.333

지방에 주둔한 군대는 상군(廂軍)이라 불렀고 주로 치안을 책임지며 도적을 잡았다. 송나라는 전국을 15로(十五路)로 나눴고, 그 내부 행정은 각각 서로 다른 네 명의 관리가 주관했다. 안무사(安撫使)는 군대와 민정을 관리하면서 상군도 지휘했다. 전운사(轉運使)는 재정을 관리하면서 감찰 업무를 겸했다. 제점형옥사(提點刑獄使)는 사법, 옥사, 소송을 관리했다. 제거상평사(提擧常平使)는 곡식 창고와 구휼을 관리했다. 또 각 사(使)의 관청도 각각 서로 다른 곳에 설치하도록 규정했고 조정의 비준을 받지 않고는 마음대로 각자의 임지를 떠날 수 없었으며 어떤 관할 구역은 완전히 중첩되지도 않았다. 상군은 안무사의 관리와 지휘를 받았지만 다른 각 사의 협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경비 조달과 감찰은 전운사를 통해야 했고, 식량과 물자 분배는 제거상평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사법, 옥사, 소송에 관한 일이 있을 때는 제점형옥사를 찾아야 했다. 또 어떤 한 지역이 그곳 사의 관할 구역에 속하지 않으면 다른 로의 주관자를 찾아가야 했다. 분권 관리와 상호 견제 시스템은 어떤 한 로의 범위 안에서 한 통치자에게 대권이 집중되는 현상을 출현할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안무사도 단독으로 상군을 지휘할 수 없게 했다. 따라서 상군을 한 개인의 사병(私兵)으로 바꾸거나 그 상군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방법이 없었다. 물론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때는 이런 시스템이 짧은 시간에 군대를 조직하고 서로 협조하는 측면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상군은 외적 방어에 큰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유명무실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 p.363~364

이세민은 울지경덕에게 완전무장을 하고 궁궐로 들어가 당 고조를 보위하게 했다. 본래 그날 아침 직접 삼형제를 심문하려 했던 고조는 매우 흥겹게 후원 해지(海池)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긴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울지경덕이 앞으로 달려오자 대경실색했다. 울지경덕은 고조에게 “태자와 제왕이 변란을 일으켰지만 이미 진왕에게 피살되었고, 지금 대신들이 국사를 진왕에게 주어 처리하게 해야 한다고 폐하께 권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당 고조는 매우 흔쾌하게 “좋다. 그것은 짐이 오랫동안 바라던 바다” 라고 윤허했다. 그는 즉시 붓을 들어 조서 한 통을 쓰고 군사들에게 진왕의 명령에 따르라고 했다. 사태가 진정된 뒤 이세민은 궁궐로 달려와 고조를 만났고 두 사람을 머리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고조는 뒤이어 조서를 반포했다. “진왕 세민을 태자로 세우고, 건성과 원길의 아들 열 명은 모두 모반죄로 처형하라.”
--- p.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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