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너 재활 치료 받더니 운동이 재미있다고 했던 거 기억 안 나?”
“재. 재미? 내가?”
“그래. 처음에는 간단한 운동기구를 사달라고 하더니, 수영을 배우겠다고 하질 않나. 태권도를 배운다고 도장에 보내달라고 하고.”
“아, 그랬지. 맞아. 그랬……던 거 같아.”
사실은 정반대다. 나는 재활 치료가 지긋지긋했고, 엄마 아빠가 극성이라고 생각했다. 해니도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는데, 재활 치료 병원 같은 데는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과학자면서 의사인 것처럼 의학적 소견을 밝혔다. 지금 완벽히 치료하지 않으면 뼈가 바로 자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성장기 아이는 더 조심해야 한다고. 아빠는 이 의견에 적극 동의하며 나에게 운동을 강요했다. ---pp.40∼41
어쩌면, 내가 겪은, 아니 겪었다고 여기고 있는 2년이 가짜 아닐까? 나는 진짜 이곳에서 체육중학교에 다니는 열여섯 살 우주인 게 아닐까? 모든 게 내 꿈일까? 장자가 그랬다.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게 꿈인지 나비가 인간이 된 게 꿈인지 모르겠다고.
〈매트릭스〉처럼 둘 중 한 세계가 가상 현실이라면? 엄마가 살아 있는 이곳을 선택할 수 있는 걸까? 내가 현실로 믿고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선택 A와 이곳에 안주하는 선택 B 중 내가 스위치를 누를 수 있다면. 파란 약과 빨간 약 중 내가 선택이 가능하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하지만 침실로 가는 엄마 뒷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있었다. 엄마가 있는 게 좋다는 것. ---p.73
해니는 누구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한 걸까? 나일까? 운영을 하지 않는 상가 병원 병실에 누워 있는 우주이겠지? 나는 해니에게 답장을 보낼 자격이 있을까? 엑스의 말대로라면 해니는 내 친구가 아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인격, 다른 삶을 가진 이곳 우주의 친구로, 내가 아는 해니와도 다른 사람이다. 여기 엄마도 아빠도 나에게 주어진 게 아니다. 나는 도둑년이다. 삶을 통째로 도둑질한 도둑년.
차마 답을 보낼 수 없었다. 내 방에 돌아와 애꿎은 연습장에 거친 선을 죽죽 그을 뿐이었다. 머물기로 마음을 정했는데, 자꾸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황스럽다.
“아냐! 싫어, 싫다고!”
어쨌거나 이건 내 미래다. 의사가 그랬잖아.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해서 미래로 나아가라고.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다들 내 인생에서 꺼지란 말이야! ---p.135
“왜? 왜 울어?”
내 부모가 허둥댔다. 나는 바보처럼 울기만 했다. 아픈 탓에 마음이 약해져서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따듯한 가족으로 보이는 상황이 환상처럼 느껴져서다. 진짜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누려야 할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다. 나는 다만 남의 자리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이다. 꼭 가상 현실처럼. 2년 전이 그립다. 진작 이런 가족을 연출하지 못한 후회가 환상으로 표현되어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가짜라고 해도 좋다. 예전부터 엄마 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한 게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녹아내렸다.
---p.193
“넌 돌아가야 해. 곧 그 애가 깨어날 거야. 날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모두 널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해.”
“그 애가 깨어난다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난 다 안다고 했잖아. 의사 놈이 차도가 있다고 보고를 했거든.”
의사가 연락을 했다고? 갑자기 남자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 뒤에 누군가 있었고, 남자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 타인을 쉽게 설득하고 조종하는 사람. 조용하고 그림자같이 움직이는 사람. 엑스라는 걸 왜 몰랐을까.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