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불현듯, 이해되었다. 적어도 알 것 같다고 느꼈다. 나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침대에 무너져내렸다.
맙소사! 놈들이 기어코?
미친놈들! 개자식들!
“미친놈들! 개자식들!” 이 말을 때론 큰 소리로, 때론 웅얼거리듯 내리 열 번은 되뇌었으리라. 나는 벌떡 일어나 수신인도 정하지 않은 채 전화기를 움켜쥐었다. 평소엔 십중팔구 파리에 사는 나의 대녀 아드리엔이지만...... 역시나 신호음이 들리지 않았다. 전화도 먹통이었다. 그렇게 네다섯 시간이 흘렀을까. 머릿속에선 여전히 똑같은 말들이 떠다녔다.
미친놈들! 개자식들! 감히 일을 벌였어!
왜냐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겐 지구에 비극이 일어났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자행된 갑작스런 세상의 종말. 우리 종족 최후의 만행. 수천 년 인류의 역사를 끝내고, 거룩한 인류 문명의 마지막 커튼을 내리는, 그와 함께 우리 모두를 멸종시킬 만행. 바로 오늘 밤. 어쩌면 내일 새벽이거나......
---「1권: 안개」중에서
“아그리젠토의 엠페도클레스.”
“그렇습니다. 내 조상들은 자신들을 ‘엠페도클레스의 친구들’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이름입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만족스러웠다. 이제 그들을 가리켜 매우 무례하고 모호한 ‘그 사람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 것이 아닌가...... 내 이웃이 물었다.
“다른 이들, 당신들 이외의 다른 이들은 뭐라고 부르죠?”
“다양한 호칭이 있습니다, 작가님. 말씀하신 것처럼 더러 ‘다른 이들’이라고도 하고, ‘그들’이라고도 하고, ‘시민들’, ‘대중’, 또......”
“대중! 대중!”
에브가 자신의 의견을 알리려는 듯, 리듬감을 살린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사공이 나열을 중단했다. 이번엔 내가 물었다.
“당신네 나라는, 아감? 뭐라고 불러?”
“우린 그냥 ‘엠페도클레스’라고 해...... 하지만 지도에는 안 나와!”
그가 미소 지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선 그가 우리에게 이 이상 더 이야기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고, 바로 이전 주제로 되돌아갔다.
“당신네 조상의 그 그리스 대탈주 이야기는 신화야, 아니면 역사적 사실이야?”
아가멤논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역사적 사실이야, 우리가 믿으니까. 어쨌든 부모님이 우리 선조의 진짜 이야기라면서 들려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나도 살아가는 내내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나아가는지, 내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지 아는 거니까.”
그는 진실하려고 애썼으나, 그럼에도 모호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 고대 그리스의 생존자들은 대체 어떻게 그런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건가요?”
에브가 묻자 아가멤논이 대답했다.
“아마도 그게 바로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서 가장 궁금하고 중요한 질문이겠죠. 곧 답변하겠다고 약속드릴게요. 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제 마음처럼 허심탄회하게 전부 털어놓기엔 지금 너무 민감한 상황이거든요. 별 탈 없으면 며칠 후에는 두 분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드릴 수 있을 겁니다.”
---「2권: 광명」중에서
사공이 나를 선박 병원으로 데려가 호리호리한 장신의 젊은 남자에게 인도했다. 파우사니아스라는 이름에 부응하는 엄격한 얼굴이었다. 역시나 고대 그리스인을 연상시키는 이름이었고,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외모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풍성한 금발과 영민한 소년 눈빛의 홀쭉한 사내로 북유럽이나 캐나다의 대학 캠퍼스에서 쉽사리 마주칠 수 있는 유형이었다.
그가 내게 단맛이 살짝 가미된 투명한 음료를 마시라고 주더니 일종의 선실 같은 아주 작은 방으로 데려가 옷을 벗게 했다. 나는 오늘 밤 당장 이곳을 그릴 것이나, 어쩌면 글과 병행하여 묘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사다리꼴을 늘려놓은 듯한 형태의 방으로 사방 벽은 코르크 또는 코르크를 흉내 낸 재질로 마감되었고, 작은 침대와 옷장과 의자 하나, 바닥의 레일에 연결된 작은 금속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는 가히 투명한 관이라 할 만했다. 적절치 않은 단어라는 것은 알지만, 그리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마 갓난아기에게 적용해야 한다면 ‘인큐베이터’라고 했으리라. 여하튼 내가 그 위에 누워야 한다는 것은 짐작 가능했다. 내가 눕자 뚜껑이 닫혔고, 그 즉시 이른바 투명한 관이 불투명해지더니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자가 레일을 따라 미끄러지며 방을 떠나 반달 모양의 입구를 통과했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이 느껴졌다. 온통 암흑이었다. 조금의 빛도, 소리도 없었다. 한순간 몸에 따뜻한 기운이 감돌면서 아늑한 기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온도가 높아졌다. 그 모든 것이 2분, 또는 3분을 넘지 않았다. 다시 방이었다. 나는 모험이 그토록 짧게 끝난 것에 거의 실망하면서 천천히 옷을 다시 입었다.
파우사니아스라는 이름의 사내가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우며 내 실망감을 눈치 챈 듯했다. 그가 황급히 내 손을 잡으며 내 경험을 축하해주었기 때문이다.
“두고 보세요, 나중이 되면 오늘 생애 가장 놀랍고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는 걸 아시게 될 겁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이 하루는 중요할 터였다. 오늘 내가 알게 된 것이며 이 경험과 상황 모두 전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내게는 동네 보건진료소에서 받는 통상적인 엑스레이 촬영 이상의 자극은 아니었다! 게다가 트랩 밑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가멤논도 그의 ‘동료’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는 어떤 과장도, 최상급의 표현도 하지 않고서 그저 심상하게 다 잘했느냐고만 물었다.
---「3권: 정박」중에서
사건이 시작되고 나서 정확히 한 달이 흘렀다. 이 일기가 시작된 것도 정확히 한 달 전이다. 한 번 이상은 이 일기를 포기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일기를 계속 쓰도록 나를 북돋는 무언가가 있었다. 오늘 나는 일기를 계속 쓸 이유가 없기에 영원히 덮는다. 내 안식처가 얼마간 관측소가 되었고, 이제 더는 아니다. 반전이 있든 없든 그들이 돌아오든 아니든 이 장은 종료되었고, 내 역할도 끝났다. 나는 당장 오늘부터 붓과 먹물로 되돌아왔다.
그럼에도 개인적 에필로그를 덧보태야겠다. 지난 30일간의 사건들은 광활한 세상을 변모시키고 역사의 미터기를 제로로 되돌려놓은 것뿐만 아니라, 이 섬도 뒤흔들어 놓았다. 이제까지는 고독의 요새였던 이 섬이 이제는 에브나 나에게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곧 우리만의 엘렉트라 여왕님을 품에 안게 될 것이다. 내 나이에, 내 생활방식으로, 아빠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나의 소중한 여인에게는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 어느 면으로는 ‘엠페도클레스 국’이 우리에게 아이를 선물한 셈이다. 아울러 아이가 커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수 해의 세월까지도. 이 이유만으로도 나는 우리의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을 그토록 수시로 저주했건만 축복 또한 해야 할 것 같다.
---「4권: 소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