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문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외 9편의 시로 등단하였고, 1994년 계간 「상상」 가을호에 단편소설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시집 『나무들이 그 숲을 거부했다』,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소설집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무정한 짐승의 연애』, 『약혼』, 장편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소설선집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등이 있다. 2008년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 「Lemon Tree」(40분)가 뉴욕아시안아메리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 파리국제단편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설계 도면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비밀한 공간을 대동강들은 자기들끼리 땅굴이라고 불렀다. 지하 2층은 1호 땅굴. 지하 3층은 2호 땅굴. 통일 대한민국 이남 상류층 남자들이 이북 여성 접대부들을 만끽하는 당대 최고급 룸살롱의 바로 밑에서 희대미문의 조선 인민군 출신 폭력 조직이 어느 스너프 필름에도 뒤지지 않는 리얼 잔혹극을 관객 없이 자주 공연하고 있었다. 1호 땅굴과 2호 땅굴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은 철근콘크리트 벽의 두께를 뚫지 못하거나 설령 새어 나간다 하더라도 호화로운 술판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온갖 소음들 속에 파묻혀 버렸다. 광복빌딩은 통일 대한민국의 모델하우스였다. --- p.25
차가 시내로 접어들었다. 교통 정체가 심했다. 길가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긴 줄을 이루며 서 있었다. 일명 통일급식소. 이북 난민들에게 통일 정부에서 하루 한 끼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서울에만 20여 군데의 통일급식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조촐한 안전망이었다. “저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남조선 반동들이 생각이란 걸 하고 살게 될까?” “네?” “이남 사람들이 저들을 얼마나 증오하고 있겠니?” 이남에 득실거리던 도둑고양이들은 씨가 말랐다. 이북 사내들이 그물과 덫으로 도둑고양이들을 잡아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이라든가 동네 공터 등에서 껍질을 벗기고 구워서 술안주로 삼았기 때문이다. 도둑고양이들을 퇴치해 줬다고 이남 사람들이 감사할 리 없었다. 그들이 그러고 있는 광경이 어느 가위 눌림보다 괴로웠기 때문이다. --- p.76
통일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의 전부를 주민등록화하는 데에 실패했다. 북한은 통일 당시 이미 국가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난민들투성이었고, 관공서 방화가 비일비재해 아날로그가 정보 시스템의 대부분이던 처지에 공문서들이 대량으로 소실되었다. 그것을 통일 정부가 회복하고 정리해야 했지만 혼란 속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나중에는 아무리 홍보를 해도 일부러 주민등록을 하지 않는 이북 사람들이 있었다. 근대적 기록이 부재한 국민들, 이른바 대포 인간들이 그들이었다. 주민 번호도 없고 사진도 없고 지문도 없다. 물증이 존재하지 않는 대포 인간들은 추적이 불가능한 허깨비들이었다. 디지털 강국을 자랑하던 대한민국은 통일 이후 국민 정보 관리에 관해서는 후진국이 되어 버렸다. 경찰이 용의자를 잡아 놓고 묻는다. 너는 누구냐? 이력을 확인할 기준이 없는 인간의 자백은 사실이 아니라 의혹에 불과했다. 자본주의의 어둠이 이러한 우수 인력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 p.105
국방 장관이 쉿, 그러며 뭉툭한 오른손 검지를 소 곱창의 단면 같은 입술에 갖다 댔다. “무슨 소리 안 들렸어?” “무슨 소리요?” “방금 밑에서 사람 비명 같은 게 났는데?” 철렁, 한 홍혜숙은 애써 태연한 척 되물었다. “에이, 소리가 나긴 무슨 소리가 났다고 그러세요?” “아냐. 내가 눈은 나빠도 귀는 보배거든? 가만들 있어 봐.” (……) 서일화가 전자 음악단 앞에서 곱게 인사를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곡목은 「당신은 모르실 거야」. 당신은 모르실 거야. 인민군들이 당신 발밑에서 뭘 하고 있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야. 땅굴 속에 붉은 두더지들이 몇 마리나 있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야. 국방 장관을 따라 그의 부하들도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추었다. --- pp.167-168
2016년 서울. 대한민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흡수통일한 이후 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곳은 양심을 잃은 부패 경찰의 횡포와 이북 출신 폭력 조직의 난립,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은 대포 인간을 악용한 각종 범죄, ‘레드아이’, ‘백도라지’ 등 신종 마약의 유통, 급식소에 줄을 선 통일 빈민의 증식 등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신세계’다. 한편, 독립운동가 이장곤의 손자이자 인민군의 영웅이었던 리강은 이북 출신 폭력 조직 ‘대동강’의 동료 림병모가 맞은 수상한 죽음의 진상을 캐기 시작한 이래로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한 사건에 말려들게 된다. 이북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수용소에서 지옥을 보고 돌아온, 광기어린 조직의 괴수 오남철, 그런 오남철이 지옥에서 함께 데리고 온 영험한 박수무당 장군도령, ‘대동강’의 3인자로 2인자인 리강에게 뒤틀린 증오를 품고 있는 조명도, 이북 출신 여성 전문 유흥업소 은좌를 진두지휘하는 여장부 홍혜숙, 고위층 당원의 딸이자 촉망받는 화가의 지위에서 통일 이후 순식간에 접대부로 전락한 은좌의 넘버원 서일화, 억눌린 분노를 마음에 품고 있는 평양 출신 수재 소년 김동철, 좌절된 순수를 끊임없는 변설로 위장한 거리의 마약상 이선우, 어느 날 갑자기 리강의 눈앞에 나타난 비밀의 여인 윤성희까지. 황폐한 통일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벌어지는, 상처와 왜곡을 안은 인물들 간의 갈등과 사건의 연속. 수수께끼의 죽음을 둘러싸고 음모와 배신의 밤이 깊어지면서 점차 가공할 진실이 드러나는데…….
2011년 남북통일이 된 이후 2016년 인민군 출신 폭력 조직 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삼은 이 소설은 통일의 음화(陰畵)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통일이 되어도 남북의 개인이 모두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런 개인의 불행은 이미 그 이전부터 편재했던 것의 심화일 뿐이라는 것, 그러기에 개인의 불행이 국가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이 작가의 전언이다. 하지만 이로써 국가가 얻는 것은 면죄부가 아니라 방조죄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국가가 곧 개인이고 개인이 곧 국가라면, 국가도 ‘비루한’ 사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근대 계몽 국가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이런 ‘국가의 사생활’은 공적(公的) 음모가 아니라 사적(私的) 원한에 의해 유지되거나 몰락한다. 환경이 국권이고 욕망이 이데올로기인 이 시대의 일급 소설이 보여 줄 수 있는 시대의 지옥도로서는 충분히 지독하다. 이런 ‘센’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리고 ‘차갑게’ 이야기할 정도로 이응준의 소설이 변했다. 그의 소설이 새로워진 만큼 이상하게 아프다. 다시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이 없어서 더 뼈아프다. 한 줄기 빛은 소설 맨 앞의 『장자』 속 우화에서 힘들게 찾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직 우리에게는 더불어 살아야 할 사적인 국가, 곧 사람들이 있으니까. 김미현 (문학평론가 ·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국가의 사생활』이 보여 주는 통일 이후의 대한민국이라는 가상의 미래 공간은, 다르게 표현하면 '디스토피아'이다. 이응준이 안내하는 이 디스토피아는 범죄와 파멸이 반복되는 그 어떤 누아르 혹은 다크 필름보다도 음울하고 어두운 색채를 띠고 있다. 이 허구의 미래 공간 속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남한 사회의 암울한 현재다. 이응준은 그 암흑의 가상 세계를 통해 지금 이 땅의 현실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이 비루해지고 타락해 버렸는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응준이 이 소설에서 진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통일 이후라는 가상의 미래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절망하고 있는 출구 없는 현실인 것이다. 유하 (시인 ·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