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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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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54쪽 | 370g | 153*224*20mm
ISBN13 9788997150298
ISBN10 8997150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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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막걸리 주전자를 받아들고 툇마루에 걸터앉는다. 마치 무슨 예식을 치르기라도 할 듯 엄숙하고 진지하다. 나는 재게 부엌으로 가 쟁반에 놋대접과 열무김치를 내 온다. 콸콸콸 소리와 함께 막걸리는 금세 한 대접 채워지고 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은 후 숨을 가다듬고 단번에 들이킨다. 손등으로 입을 쓱 닦고는 열무김치를 집어 잡수신다. 빨간 김칫국물이 모시적삼에 한 방울 떨어진다. 어적어적 김치 씹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나도 덩달아 침을 꿀꺽 삼킨다. 아버지 콧등에 어느새 빠알간 봉숭아꽃이 피어난다.
---「봉숭아 꽃물」 중에서

인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기분이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목소리 톤을 어느 정도 높이고 얼마만큼 낮추는가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이 달라진다는 것 또한 빵집 남자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이참에 나도 연습을 해야겠다. 이왕이면 내 집이나 화원에 오는 손님을 유쾌한 말과 목소리로 맞아야겠다. 장삿속이 아닌,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윤활유 역할을 하는 인사말을 하는 것이 크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 아주 작은 변화로도 가능할 터이니 한 번 시도해볼 만하다.
---「유쾌한 빵집」 중에서

대개 명품이라 하면 값이 비싼 유명상표를 떠올리게 된다. 내게도 그런 물건은 몇 가지 있다. 선물을 받은 것도 있고 어렵게 계획을 세워 장만한 것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성을 다해 손으로 만든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니 내게는 최고의 명품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그깟 천 조각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호들갑떤다며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기에 명품인 것이다. 나에게는 명품 항아리도 있고, 명품 돌멩이도 있으며, 명품 밥상도 있다. 값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세속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나에게 건네주신 분들을 생각하면, 억만금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인 것이다.
---「나만의 명품」 중에서

도감을 찾아보았다. 뿌리부터 잎, 꽃까지 부분별로 찍어 놓은 사진이 반갑다. 뭔지도 모르고 냉이를 닮았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캐온 황새냉이, 그 새로운 존재에 놀라고 그 맛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도감에는 그의 꽃말이 ‘그대에게 바친다’라고 되어 있다.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나를 위해 그대를 바친다 하지 않는가.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온몸을 바친 황새냉이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서툰 솜씨로 어설프게 캐느라고 뿌리가 끊긴 이들에게는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그대에게 바친다」 중에서

지나온 내 삶도 맘에 안 드는 곳만 골라내어 빨래를 삶듯 삶아낼 수는 없을까. 지금껏 살아오면서 시행착오로 생긴 얼룩들이 눈에 거슬린다. 내가 저지른 잘못임으로 답답할 뿐이다. 그렇다고 다시 태어날 수도 없고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원망할 수도 없다. 옷을 정성껏 손질해 챙겨준 엄마도, 그 옷을 멋스럽게 입었던 아버지도 지금은 아니 계신다. 새처럼 재잘대던 형제자매들도 어느새 희끗희끗한 서리를 머리에 이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나이가 되었다.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았던 두 분이 눈 한 번 깜빡한 사이에 먼 곳으로 가버렸다.
---「빨래를 삶으며」 중에서

나는 꿈을 접지 않았다. 마흔을 훌쩍 넘겨 어렵게 꾼 꿈인데 쉬이 접기는 억울하다. 무엇보다도 이층집은 내가 갖고 싶었던 집이고 그 이층집에 꽃과 커피 향을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못 이룰 일도 아니다. 못 이룰 까닭이 무엇인가. 혹시 눈먼 집 한 채 있나 틈나는 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꿈만 이룰 수 있다면 그 집이 아니라도 좋다. 1층엔 화원을, 2층엔 커피집을 차리련다. 머릿속에는 이루어야 할 꿈이 생생하다. 조만간 꿈의 궁전으로 보란 듯 들어갈 것이다.
---「마흔일곱에 꿈꾸는 이층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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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짧되 여운은 결코 짧지 않은, 사유의 정점인 글들
장맛비가 한바탕 휘젓고 간 강물, 비로소 제 색깔을 찾아 제 속도대로 천천히 흐른다.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심정은 이미 그 대상과 일치를 이룬다.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나는 변한 것이 아니고 그냥 흐르고 있었다’, ‘변한다는 것은 흐르고 있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해 흐르는 것에서 빗겨나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모두 흐르고 있다’는 그것뿐이 아닐까.” 그의 사유의 정점이다. 변화(흐름)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불변의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은 시시각각 변하되 그 가운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즉 만물을 변화하게 하는 바로 그 이치는 변치 않는다는 것. 변역變易 속의 불역不易이다.
손에 든 찻잔이 식을 때까지의 사유이다. 일념一念 즉 무량겁, 글은 짧되 여운은 결코 짧지 않은 글이다.
- 맹난자/ 수필가

깊은 응시가 배어 있는 글의 진정성을 아는 작가
한복용의 수필집『우리는 모두 흘러가고 있다』의 작품 어느 페이지를 열어 읽어도 어떤 특별한 수사 때문에 독서호흡이 방해되거나 꼬여 있는 문장이 없다. 우리 삶의 뒤란을 돌아 흐르는 작은 개울처럼 조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졸졸졸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듯 문장이 흐른다. 읽다보면 그 문장들이 이내 어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또 하나의 그림을 만든다. 그의 글은 마치 옆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그는 요란하지 않게 낮은 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이듯 들려주는 말과 글의 진정성을 아는 작가이다. 그의 글 속엔 그가 살아온 삶의 내력뿐 아니라 이제까지 만나온 사람들과 그 속에 숨쉬어온 자연들과 오랜 시간 친구처럼 옆에 두어온 사물들에 대한 깊은 응시가 배어 있다. 그것이 우리 마음 안에 또 하나의 무늬를 그리게 한다.
이순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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