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씨, 어찌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제 성의라니까요, 성의! 나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지금 광고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아침은 꼭 드시는 게 좋아요.” “하는 짓이 꼭 나 착한 일 했으니 상 줘요 하는 표정이군.” 현재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볼을 건드렸다. 주영은 그의 행동을 좋은 쪽으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의 표정을 밝은 것을 보아하니 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하면 된다.’ 만고의 진리였다. “박현재 사장님.” 그녀의 코맹맹이 소리에 현재가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신 분이죠?” “할 말만 하라고, 김주영 씨. 상당히 적응 안 되는군.” “어제 당신을 위해 밤샘까지 해 몸에 좋은 음식 자료를 찾고 재료 사다 나르고 다섯 시부터 음식을 만드는 데 도와주고 이렇게 여기 당신 회사까지 왔잖아요.” “사설 다 자르고 하고 싶은 말은?” 칼자루 쥐고 있는 그답게 거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녀가 얼마나 용기를 내서 여기까지 온 것을 알면 저리 야박한 말은 못할 것이다. “그럼 제 지성이 하늘에 몇 퍼센트 닿았을까요?” “무슨 말이야, 그게?” “제 지성이 하늘에 닿게 하려면 계획을 짜야 하잖아요. 막연하게 주먹구구식으로 하는 것보다 계획성 있게 착착 진행시키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계획으로 밀고 나가시겠다? 분명 내 방법대로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옆에서 성의를 보이면 무슨 희망적인 답변을 주어야 저도 생활을 하죠. 당신 때문에 잠도 안 온다고요.” “다행이군. 나만 억울한 줄 알았는데.” 맨 위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얼떨결에 주영도 같이 내려버렸다. 지금쯤 회사로 출근할 시간이건만 남의 회사로 출근해서 뭐 하는 건지 스스로도 한심해 보였다. ‘뭐 하는 짓이긴, 육천오백만 원 탕감작전이지.’ 그녀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하루 속히 그가 육천오백만 원을 탕감해주길 바랐다. 그녀의 방법이 뭐가 나쁜가? 그의 자존심을 세우는 날까지 이 한 몸 품 팔아 탕감 받겠다는 일이 그리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이 문제로 끙끙 앓다 여성 센터에 문의전화까지 한 성의를 보였다. 상담 결과는 무조건 잘못했다, 그 사람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거부감이 있거든 그 거부감을 느끼지 하지 않게 해주어야 하며 전화를 끊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잘못을 알고 다시는 그런 과오를 저지르지 말라는 충고까지 받았다. “당신 방법도 좋고, 내 방법도 좋다 이거예요.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음식까지 해다 바치는데 감사하다는 말 정도는 해주어야 하잖아요.” “나만을 위해, 정말 내가 걱정되어 이 음식을 가져왔다고 말 할 수 있으면 하지.” “그럼 당신 식이 어떤 건데요? 알아야 준비를 하죠.” “예를 들어 이런 거지.” 그는 그녀가 준 보자기를 그의 책상에 내려놓더니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긴장한 주영은 마른침을 애써 삼켰다. 진지한 그의 까만 눈동자, 재미있다는 듯 살짝 치켜 올라간 눈썹. 이 모든 게 그녀의 신경을 조이고 있었다. ‘이 남자 설마 감사의 인사로 키스를 하려는 건 아니지. 키스보다는 돈이 좋은데.’ 그가 주영의 두 볼을 당기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그녀는 두 볼을 감싸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게 당신 방법이라고요?” “당신 볼 말이야, 상당히 말랑말랑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 느낌까진 기억 못하는 현재로서는 꼭 그녀의 볼을 만져보고 싶었다. 그녀가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않았다면 그는 좀 더 천천히 그 감촉을 즐겼을지도 몰랐다. 이제부터 그는 모든 것을 그의 손으로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럼 이 나이에 벌써 고목나무 껍질일 줄 알았어요?”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잠을 잘 못 자. 그래서 요즘 피곤해 죽을 지경이야.” “제 양심을 푹 찔러주고 싶었다면 성공하셨네요. 축하해요.” 주영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해결해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제가요? 어떡해요?” 해결책을 보여준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역시 음식 가져오길 백배 잘한 일 같았다. 벌써 그의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은가. “당신이 옆에 있어주면 될 것 같은데.” “당신 옆에서 당신 잘 때까지 있으라고요? 다른 건 다 괜찮지만 그건 안 될 것 같네요. 제가 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또 외박하면 이번엔 정말 맞아 죽거든요.” 외간 남자랑 밤에 단둘이 있는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남자의 속은 검댕이 숯보다 더 검다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은 아닐 것이다. “누가 밤이라고 그랬나? 아님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가 보지?” “그럼 여기서 자장가라도 불러요?” “이번 주 토요일 오후 두 시 한강공원으로 갈 테니 약속 잡지 마.” “잠자는 거랑 당신과 한강공원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거기서 잘 테니까. 자는 동안 옆에서 보초 서라고.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음식 챙겨 여기로 가져오는 것보다 쉬운 일일 텐데?” “토요일이면 공원에 나오는 사람도 많을 텐데 정신 사나워서 어떻게 자려고요?” “그러니까 당신보고 보초 서라는 거잖아?” “아, 예. 누구 명령인데 어기겠습니까. 그럼 그때 봐요. 맞다. 출근!” 그와 토닥거리느냐고 주영은 출근 시간을 깜빡 잊고 있었다. 서둘러 나가려던 그녀가 갑자기 걸음에 급정거를 걸며 뒤돌아 그의 앞에 다시 섰다.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갚아야 할 건 갚아야 했다. “이건 말이죠, 당신이 그 치사빤스한 짓 때문에 내가 당한 정신적 피해보상을 갚는 것이니 이해해달라고요.” 주영은 자신의 입술을 양 손바닥에 도장 찍듯이 눌렀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의 손바닥을 그의 양 얼굴에 꾹 눌렀다. 뒷수습은 감당하지 못하기에 주영은 무조건 사장실 문을 박차고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들어섬과 동시에 닫힘 버튼을 여러 번 누르는 그녀의 최대 목적은 오직 하나 ‘탈출’이었다. 그러나 신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닫히려는 문 사이로 그의 구두가 그녀에게 인사라도 하듯 빠끔히 내밀자 문은 ‘열려라, 참깨’의 주문처럼 스르르 열리고 말았다. 알리바바가 사십 명의 도적을 마주쳤을 때의 심정이랄까? 그녀는 벌써 자신의 행동으로 후회가 썰물처럼 밀려들어왔다. 아니, 해일처럼 덮치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희망은 그가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녀를 신사답게 고이 보내줄 것이다, 라는 것에 걸고 있었다. 현재가 강제로 팔로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있자 엘리베이터에서 단조로운 전자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경고음이 그녀의 처한 현실과 너무 잘 어울려 그녀에게 더욱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주영은 당당히 그를 쳐다봐주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 그녀가 찍어놓은 입술 마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겼지만 여기서 웃음을 터뜨렸다가는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 같아 혀까지 깨물어야 했다. 긴장을 최고조로 이를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김주영 씨, 안녕히 가시기 바랍니다.” “네?” 동그래진 그녀의 눈은 의구심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버럭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안녕히 가라고? 갑자기 마음의 수양이라도 쌓았나? 아님 너무 어이가 없어 화내는 것도 잊어먹었나? “오늘 삼진테크 시찰이 잡혀 있던데 그때 봅시다. 다시 만날 날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김주영 씨?” 주영은 너무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머리에서 경종이 쉼 없이 울리고 있었다. 그에게 잘 보여도 될까 말까 한 일을 그녀는 아예 삼층밥에 밥솥까지 태운 꼴이었다. 일단 그를 피하고 봐야 했다. 하루 종일 회의만 하던지 과장님에게 출장이라 말한 뒤 잠적하는 게 최선의 방법 같았다. 아니, 그 길만이 그녀가 살 길이고 나아갈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