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는 건 좋지만, 설 연휴 전에는 돌아와.”
떠나는 내게 남편은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그런 그에게 나 역시 지지 않고 반박했다.
“아니. 두 달 다 채우고 들어올 거야. 입학식 전에는 어떻게든 돌아올게”
한번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가 또다시 똑같은 말을 꺼내는 바람에, 아이 앞에서 그만 크게 싸우고 말았다.
“어디 그러기만 해봐. 그 다음엔 나도 책임 못 져!”
그 싸움 끝에, 그는 마지막 경고라도 되는 듯 그렇게 엄포를 놓았다. 그는 마치, 명절만 함께 쇤다면 왔다가 다시 나가도 좋다는 듯 오직 ‘명절’만을 문제 삼았다. 우리의 안전이나 아이의 건강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명절 연휴’를 그의 식구들과 함께 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화를 냈다.
--- 「침묵」 중에서
아이와 단둘이 길에 나선 내게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도 없이 두 달씩이나 배낭여행을 하다니. 남편이 어디 모자라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뭔가 중대한 잘못이라도 했어? 그게 아니면 어떻게 배낭여행을 보내줄 수가 있어?”라고.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를 여행 보내준다는 용어를 쓰는 건지, 우선 그것부터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나를 비난하는 이들 대부분이 같은 여성이라는 점도 아이러니했다.
결혼한 여성은 오랫동안 좋아해왔던 배낭여행조차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히잡 쓴 이슬람여인들처럼 남편의 동행 하에서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아빠는 어디 있니」 중에서
남편이 나에게 집안일과 육아를 맡기고 성공이라는 탄탄대로를 달려가는 동안, 나는 유모차를 밀며 동네 마트와 문화 센터를 오갔다. 나에게도 집안일과 육아를 대신해줄 아내가 있었다면, 남편처럼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하고 경제적 자유까지 누렸을 것이다.
언젠가 억울해하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누가 너에게 일 그만두라고 했어?”
고통의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런 아픈 말을 쉽게 내뱉는 남편에게서 비롯되는 걸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어리석은 선택을 한 나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가족을 위한 배려가 결국엔 내 마음을 병들게 하고, 남편과 나의 관계를 원망과 분노로 물들게 하리라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여행 그리고 블로그 中)
시커멓게 세월의 때가 앉아있는 돌무덤 사이를 나란히 걷는 일.
그 돌무덤 어딘가에 걸터앉아 이곳을 언제 다 둘러볼까 한숨을 내쉬는 일.
다시 숙소로 되돌아갈 땐 무얼 타고 가야할까 고민하는 일.
이 모든 순간들이 그리운 날이 언젠가 올 것이다. 비록 아이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낮은 돌담 위에 드러누운 아이를 바라보며 이제 어디부터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내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 「앙코르 와트를 걷다」 중에서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났다. 다시 아이 손을 잡고 태국을 찾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더 이상 여행이 즐겁지 않다는 사실도 여전했다. 종종 혼자 눈물을 흘렸고, 자주 외로웠다.
이번 여행은 다를 거라 기대했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내 삶만큼이나, 내 여행도 어느새 활기를 잃었다.
도무지 여행의 의미를,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다시 이곳을 찾았다. 대체 무엇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 「대체 무엇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이끌었을까?」 중에서
때마침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미국인 노부부가 근처를 지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방금 도착한 그들 역시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흰머리가 성성해진 남편과 단둘이 이곳을 찾을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오래 전 아이와 함께 했던 이 시간들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지난 시절 내가 제일 잘 한 일 중 하나가, 이 꼬마 여행자를 데리고 단둘이 여행했던 일이라며, 추억이 방울방울 어린 이곳에 서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눈물이라면, 얼마든지 흘려도 좋겠다.
--- 「올드 바간 자전거 투어」 중에서
아이는 내리 세 시간을 꼼짝 않고 잠만 잤다. 아이가 안쓰러웠지만 이제 이 고생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아쉬웠다. 다시 돌아갈 일이 까마득했다. 애초에 나는 ‘전통’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된,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를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결혼 제도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아이를 낳았다. 다시 그곳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느니, 22시간씩 버스를 타고 다니고 몸을 혹사시키며 여행하더라도 여기, 이곳에 있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돌아갈 날을 불과 며칠 앞두고,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 「22시간의 버스 여행」 중에서
꼬박 이틀을 이불 속에 누워 지냈다. 잠깐 시간을 내어 밀린 빨래를 하고, 집 정리를 한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베란다, 방, 부엌, 거실을 둘러보아도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았다. 더럽고 낡고 삐걱대는 침대가 놓여있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넓고 깨끗한 이 집이 오히려 생소하게 느껴졌다.
‘이곳이 원래 내가 있었던 곳인가?’
두 달간의 여행 후유증이었다. 몸은 이곳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아직 그곳을 떠나오지 못했다. 돌아오고 싶지 않던 바로 그 마음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듯 했다. 삐걱거리는 게스트하우스 침대가, 배낭여행자들과 뒤섞여 타고 오던 낡은 버스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던 그 순간들이 모두 그리웠다. 오래 전 캄보디아 여행에서 돌아와 후회했던 때처럼, 이번에도 돌아오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찾아왔다.
--- 「여행 후유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