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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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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9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436g | 140*210*17mm
ISBN13 9791190526913
ISBN10 119052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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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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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은 초등학교.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이 쓴 소설책에 10억짜리 수표를 끼워 등기로 보냈다. 주소와 발신인은 적당하게 썼다. 시골에서의 아련한 추억과 큰 차별 없는 유년시절을 보내게 해준 데 대한 감사다. 교장 선생님께, 유용하게 사용하십시오. 컴퓨터 구입, 급식은 나라에서 잘할 것이고, 어디에 쓸까 고민해서 사용하십시오. 제 머리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끼리 분빠이해서 따까마시하지는 마시고. 그렇게 한다 해도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저는 11회 졸업생입니다.

2는 중고등학교. 역시 소설책에 오억짜리 수표를 끼워 보냈다. 교장 선생님께, 등록금 오천 원을 못 내서 교실에서 쫓겨난 적 있습니다.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조치였겠지요. 나를 쫓아낸 선생님도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유용하게 사용하십시오. 선생님들끼리 분빠이하지 마시고. 저는 2회 졸업생입니다.

3은 대학교. 5만 원권으로 현찰 3억과 소설책 한 권을 택배로 보냈다. 총장님, 학교 발전기금입니다. 장학금 한 번 받지 못한 우울한 문학 지망생에게 장학금으로 쓰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사은파티」중에서

자정이 넘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명감 앞에 고스란히 놓여있을 뿐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피로감은 표적이 불분명할 때 더욱 가중되는 것인지 전신이 욱신거렸다. 짜증을 은폐해야된다는 강요에 전신이 옥죄듯이 쑤셨다. 무료가 깊어지는가 싶었는데, 걸걸한 목소리를 앞세운 사내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충성! 수고하십니다아! 민중의 지팡이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그들은 대뜸 거수경례를 올려붙였다. 자욱한 연기 속에 가라앉아 있던 군상들이 눈을 멀뚱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또 무슨 물건인가하고 가죽잠바들의 눈빛에 짜증이 자욱했다. 훤칠한 키에 정장 차림의 사내가 반팔셔츠를 입은 사내를 껴안듯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부축을 받아야 할 쪽은 정장 차림의 사내 같은데 오히려 그가 반팔셔츠 사내를 휘감고 있었다. 정장 사내한테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그들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상석에 앉은 대머리 가죽잠바 앞으로 비틀거리며 함께 걸어갔다.
---「나팔과 잣대가 있는 풍경」중에서

삼십대 후반이란 우리의 나이는 금방 분위기에 친숙해질 수 있는 경륜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 역시 우리 또래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스스럼없다는 것은 모질게 말하면 뻔뻔스러움이겠지만 한편 여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막힘이 없다는 건 어쩌면 그토록 갈구하는 깨달음의 한 모습일 것이다. 새로운 신도에게 김 교수는 그 특유의 현학적 어휘를 휘두르며 장광설을 펼쳤다. 여인은 조금씩 발그레해지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가지런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기도 했다. 치열이 고른 하얀 이를 반쯤 보이게 웃는 웃음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있을까. 그녀의 부신 얼굴을 바라보며 저마다 온갖 추측들로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운 시냇가」중에서

요한, 그때 김호영이 자꾸 허황된 얘기를 해대던 것이 생각나지. 자신이 긁적인 이상한 지도를 펴놓고 환상의 섬이니 부동항이니 하면서 암호 같은 말들을 지껄일 때 이미 그의 뿌리는 습기가 말라가고 있었다. 우리가 그에게 다가갔던 사랑의 방식이 참으로 부정직했다는 것을 몰랐다. 치기와 너스레로 그를 감싸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잘못 알았다. 길이가 짧은 한쪽 다리를 받쳐주는 것이 우리들의 호방함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엉뚱한 곳으로 그를 끌고 갔던 것은 아닐까. 편견 없이 대한다는 거창한 명분에 우리 스스로 취해서 그의 아픔을 외면하고 우리끼리 자기만족에 희희덕거린 것은 아니었을까. 탈출을 꿈꾸면서도 탈출을 감행할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함량이다.

그리고 명백한 명분도 없이 탈출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변명이 함정이다. 명백한 명분이야 독립운동이나 반정부운동이 확실하지. 그러나 우리 모두가 혁명가나 투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것 또한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함정은 어떤 것이든 고통이다. 글쎄 함정 속의 고통을 즐기는 족속이 있을까. 개미귀신이 파놓은 함정을 기어오르는 개미의 안간힘을 본능적 유희라고 할 수 있을까. 김호영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뒤척였던 몸짓을 자족, 자학의 유희라고 할 수 있을까.
---「쥐라기의 사계」중에서

그들의 강학은 계속 이어졌다. 계절이 바뀌고 드나드는 선비들이 바뀌었지만 강학의 모습은 한결 같았다. 주지 스님은 다른 스님들에게 그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선비들은 우리 집에 찾아든 갈 곳 없는 새들이다. 언젠가는 떠나갈 새들이다. 부처님 봉양하듯 불편하지 않게 잘 받들어라. 선비들이 무슨 공부를 하는 지 관심두지 마라. 누가 오는지 누가 가는지도 관심 두지마라. 그건 남의 집 곳간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고 몰래 훔쳐보는 짓이다.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라는 주자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 하심을 잃으면 모든 수행은 헛것이다.”

공양을 준비하는 스님들의 일이 두 배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고 설거지도 하지 않던 선비들의 태도가 조금씩 변했다. 식사를 하고 난 후에 발우 닦듯 그릇을 깨끗이 닦고, 경내에서 스님을 만나면 하대하듯 뒷짐을 지던 선비들이 스님들과 합장례를 나누었다. 스님과 선비들이 어울려 근처 계곡에서 탁족을 즐기기도 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다르지만 생활방식은 다르지 않았다. 스님들의 철야정진, 삼천 배 올리기, 묵언수행은 선비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이었다. 선비들이 잠을 쫓으며 밤새워 소곤거리는 토론은 스님들에게 자극이 되었다. 공부와 수행이 다르지 않구나. 불이법문이 그들에게 눅눅하게 스며들었다.
---「아니 왜? 천친암」중에서

자기야말로 자신의 주인이고 자기야말로 자신이 의지할 곳,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 쇠에서 생긴 녹이 쇠를 먹어 들어가듯 자신의 허물 때문에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가는 것이리라. 이제 내가 혹은 그대가 해야 될 일은 정복한 나라를 버린 왕처럼, 숲속을 다니는 코끼리처럼 홀로 가는 것입니다.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 내어 흐르지만 큰 강물은 소리 없이 흐릅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반쯤 채운 항아리가 아니라 가득 찬 연못일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일이 있다면 우리의 가슴에 담긴 사랑을 흠집 없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마치 연꽃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식탁 위에서 발견한 그녀가 남기고 간 언어를 나는 꽃씨 받듯 한 알 한 알 가슴에 받으며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 좁은 도랑을 오르내리며 미꾸라지 모양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 누구를 위하여 경적을 울리나. 서로를 튼튼히 얽어매기에는 너무 가늘어 보이는 전신주에 걸려있는 난잡한 줄들, 그 풍경 위로 희미하게 광활한 밀림이 환시처럼 오버랩 된다. 날랜 말을 타고 날선 검을 휘두르며 달려야할 원시림으로.
---「첫사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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