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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지식인 윤선도 : 사상과 네트워크

비판적 지식인 윤선도 : 사상과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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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92g | 153*225*13mm
ISBN13 9791156122296
ISBN10 115612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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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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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의 생각과 행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이 그가 ‘감언지사敢言之士’ 그리고 ‘직언지사直言之士’라는 것이었다. 윤선도가 광해군 대 〈병진소丙辰疏〉를 올릴 때 옹호했던 이형李泂과 종실 귀천군龜川君 이수李? 등은 그를 “권간權奸에 대해 과감히 말한”,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사람이라 평했다
--- p.18

부친인 윤유기 대에는 오히려 북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선도가 대북의 영수였던 이이첨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그가 당색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 p.27

그는, 국가가 보존되고 멸망하는 것은 민심을 얻느냐 잃느냐에 달려 있는데, 부세를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많이 늘리려고만 하는 갑술양전은 농민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켜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면서, 양전 결수를 줄이고 등급을 낮춰줄 것을 청하였다
--- p.29

1638년 강화도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에 있던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윤선도는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게 된다
--- p.30

〈진시무팔조소〉를 올린 지 한 달도 안 되어 윤선도는 척신인 원두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가 재주는 많으나 덕이 없고 이익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활하며 표독스럽게 화심禍心을 감추고 있어 장차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므로 먼 지방으로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 원두표 비판 상소로 인해 윤선도는 삭탈관작 문외출송門外黜送 당하였다
--- p.33

윤선도는 상소에서, 오히려 북인의 대표적인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정개청을 “동방의 진유眞儒로 이황에 버금간다”고 높이 평가하고 그의 문집인 《우득록愚得錄》을 간행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동시에 송준길이 자산서원 훼철을 주장하며 그 명분으로 내건 내용을 상세히 반박하며 이 일이 정개청 죽음에 책임이 있는 정철의 혐의를 벗겨주기 위한 것이라고 강력히 비판하였다
--- p.34

권시가 상소를 그만둘 것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윤선도는 “상소가 가로막혀서 위에 진달될 수 없다면 그만이지만 어찌 내가 스스로 그만둘 수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이해를 따지지 않았으니 어찌 위세威勢와 화복禍福에 겁을 먹어 뜻을 굽혀 세상에 아부하겠는가” 하며 올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 p.34

효종의 정통성을 직접 거론하고 송시열을 정면 비판한 윤선도의 상소는 서인의 강력한 반발을 가져왔다. 그들은 윤선도를 남곤·심정·유자광에 비유하며 그가 무고誣告로 사림을 말살시키려고 한다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결국 그의 상소는 불태워지고 윤선도는 삼수로 유배되었다
--- p.36

광해군 대 이이첨은 말할 것도 없고 현종 대 송시열의 위세는 중국에 군약신강君弱臣强으로까지 소문이 났으며, 《실록》에서 사관이 “당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송시열을 칭송하는 것을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 p.37

공公은 준정峻正하여 인의를 쌓아 널리 베풀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으며 곡례曲禮와 자잘한 은혜로 명예를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말과 행동에서 남에게 구차하게 영합하려 하지 않아 환난과 궁액에서도 한결같았다. 도道를 곧게 지키다 배척당하여 죄인의 명부에 있은 것이 20년이었다
--- p.37

홍우원은 〈시장諡狀〉에서, “윤선도가 소싯적부터 뜻이 맞는 사람이 적어서 교유를 삼가고 출입을 가려서 하였으며 출세를 위한 길이나 권귀權貴의 문간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본인 스스로도 “편당偏黨을 짓지 않고 교유를 일삼지 않았으며 성격은 한적한 것을 좋아하고 마음은 염퇴恬退에 두었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 p.39

군자가 벼슬을 하는 것이 영록榮祿을 위해서인가 군민君民을 위해서인가. 사체四體를 떨치고 일어나서 도를 행하며 세상을 구제하여 종사에 공을 세우고 창생에게 은택을 베풀 수 있다면 국궁진췌鞠躬盡?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부질없이 머리에 높은 진현進賢의 관을 쓰고 태창太倉의 곡식을 허비하거나 한갓 이해의 길목에서 왔다 갔다 하며 쓸데없이 시비의 영역에서 분주하기보다는, 차라리 밭이랑 사이에서 느긋하게 노닐고 강과 바다 위에서 방랑을 하거나 하여 소쇄瀟灑하게 일월日月을 보내며 나의 연수年數를 마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 p.47

윤선도는 스스로 항상 동중서董仲舒의 “그 의리만 바르게 하고 이익은 꾀하지 말 것이요, 그 도만 밝히고 공은 헤아리지 말 것이다”라는 말을 되뇌면서 “평생토록 의를 지키면서 이 의를 버리고서는 행동하지 않았으며 세상길에서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엎어지면서도 다시 인내하며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 p.53

이욕을 곰 발바닥으로 여기는 자들이 온통 세상에 횡행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명철이 많단 말인가. “뜻있는 선비는 자기의 시신이 도랑에 버려지는 한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항상 생각한다”는 말, “죽음으로 지키면서 도道를 잘 행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 “죽도록 변치 않는다”는 말이 바로 성인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 p.61

1652년 효종에게 올린 《진시무팔조소》에서는, “몸을 닦는 큰 법도는 《소학》 한 책에 거의 모두 담겨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큰 도리는 《중용》과 《대학》 두 책으로 충분하다”며 수신의 대법大法으로서 《소학》을 강조하였다
--- p.78

윤선도의 격물물격설은 물리物理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인식의 성립과정을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인 과정이 아닌 사물과 인간의 상호적인 과정, 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며 이는 실천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황이 “인간의 추구가 부족한 경우가 있을지언정 리理의 응답이 실패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 p.83

윤선도는 제자에게 “도道를 배워 권權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모든 일을 처리할 적에 오직 도만 밝히고 공은 생각하지 말 것이요, 그 의리만 바르게 하고 이익은 꾀하지 말 것을 요체로 삼아야 한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하였다. …… 또한 당시의 병통은 “알지 못하는 데에 있지 않고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과 행하더라도 참되게 하지 않고 힘껏 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 p.85

윤선도는 “하늘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세운 것은 한 사람을 후하게 하고자 함이 아니요 만민萬民을 위한 것이며, 임금이 관직을 설치한 것도 백관을 후하게 하고자 함이 아니요 만민을 위한 것이다”고 보았다. 따라서 임금은 백성을 친근히 해야지 낮게 보아서는 안 되며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였다
--- p.89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올린 〈기축소〉에서 본격적으로 득인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정치의 요체가 인재를 얻는 데에 있으며 좋은 인재를 얻으려면 임금이 먼저 도道로써 몸을 닦아야 하며 도는 인仁으로써 닦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 p.89

박동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족한 것은 인재이지 양식이 아니며 장수이지 군대가 아니다”고 강조했던 윤선도는 자신이 본 과거의 책문에서, 제승制勝의 요체는 병기兵器에 있지 않고 장수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 패한 것도 모두 임명한 장수가 적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하였다
--- p.92

군신의 분의分義를 알지 못하고 천리天理의 정도正道를 알지 못한 채 한갓 고관의 복장만을 영광으로 알고 녹봉만을 이익으로 알면서 털끝만큼도 국가를 도와주는 일이 없이 벼슬에서 물러날 나이가 넘었는데도 계속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스스로 달갑게 여기는 것은 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 p.94

붕당이 이렇게까지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개 붕당이 생기고 나면 시비가 뒤바뀌고 현사賢邪가 뒤섞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군자는 모두 물러나고 소인은 모두 진출하여 임금이 임금답게 되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되지 못하니 이러고서도 어떻게 국가를 보유할 수 있겠습니까
--- p.95

국가에서 사랑하고 보살펴야 할 것은 응당 백성이지 소나무가 아닐 텐데 지금 소나무만을 위하고 백성은 돌아보지 않아서 수만 적자赤子가 살 곳을 잃고 허둥지둥하게 한다면 이것이 과연 선후를 아는 일이냐며, 오히려 송금松禁을 엄하게 행하되 주민을 쫓아내지 말고 세금을 거두도록 하면서 개간한 땅을 버리지 말게 하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고 주장하였다
--- p.104

그의 안민론이 철저히 민본民本과 균부均賦에 기반했기 때문이다. 수사적으로 말로만 하는 민본이 아니라 실천적인 민본, 위민의식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가 노비 추쇄에 반대하면서 “유독 노비만 만대토록 노비가 되어야만 하는 이치가 있느냐”고 항변한 것도, ……
--- p.110

윤선도는 이처럼 의도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상은 사족이나 문인·사대부라 할지라도 일단 의도를 알기만 하면 곧장 단점으로 여기고 비천하게 여기고 비루하게 여긴다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 p.134

윤선도집안은 처음 강진에 지역적 기반을 마련한 이후 해남 백련동으로 옮겨 정착하고 이어 처족으로부터의 재산 상속과 간척 사업 등을 통해 해남, 장흥, 강진과 진도, 완도 등 서남해안 지역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호남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누대에 걸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계기로 서울과 근기 지역에 집과 별서를 마련하고 서울 지역 사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울 중앙과의 지역적 관계망을 구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
--- p.166

윤선도의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는 존군尊君의식과 경敬?의義?예禮의 강조, 하학下學의 중시와 박학적 성격 등은 그의 학문·사상이 북인과 정개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음을 나타낸다
--- p.170

윤선도는 득인론을 정치뿐만 아니라 민생, 국방, 향촌 등 국가의 모든 분야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방책으로 제시하고 이를 재이론·안민론·붕당론 등과 연결시켜 “하늘의 뜻을 돌릴 방도는 안민에 있고 안민은 오직 득인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 p.177

윤선도는 조선 전체 역사에서 보면 기묘사림의 도학→서경덕학파→북인의 학문→북인계 남인(호남남인)의 학문→근기남인실학(호남실학)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호남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호남의 역사에서 보면 이전에 최부계열→서경덕계열→정개청계열로 이어지는 흐름과 문학에서의 고문부흥운동의 흐름을 일단락 짓고, 이어서 18세기 이후 ‘호남실학’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 p.180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과감히 말했다고 해서 ‘광동’과 ‘광생’ 취급을 받았던 이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심원은 조부 보성군이 “이심원이 자신에게 행패를 부렸다”고 고발하여 이천과 장단 등의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고 남효온도 의금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평생 은둔과 방황이라는 고난에 찬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12년 뒤인 1504년 갑자사화 때 남효온은 ‘소릉복위를 청한 죄’로 무덤이 파헤쳐져 부관능지剖棺凌遲 당하였다
--- p.200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 등 반정을 주도했던 세 명의 공신이 1513년(중종 8)을 기점으로 모두 사망하여 공신세력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든 반면 소릉 복위과정 등을 거치면서 사림들의 영향력은 점차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구와 척신세력들은 아직 건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폐비 신씨의 복위와 세 공신의 처벌을 주장한 박상과 김정의 상소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 p.205

남효온, 김일손, 박상, 김정, 윤선도 …… 이들 말고도 조선시대에는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전환기마다 물줄기를 바꾸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아니 파란만장하다고 해야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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