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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따위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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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0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153*224*30mm
ISBN13 9791191538144
ISBN10 119153814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수업을 시작하며 (서론)

나는 얼마 전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에 관한 수업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강좌가 개설되고 학생들 20여 명이 강의를 듣기 위해 작은 강의실에 모였다. 강의실은 작지만, 내부가 반원형을 그리면서 수업에 집중하기 좋게 설계되어 있었다. 강의 과목은 ‘최소행복이론수업’이다. 학생들은 골치 아픈 다른 과목보다 편안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강의를 신청한 것 같다. 특히 대화식 수업으로 진행하는 것에 흥미로워했다.
그런데, 조금 주의를 끌 만한 강의 제목과 달리 학생들은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행복에 대해 뭘 강의하려고 하는지 의구심을 갖는 모습을 보였다. 몇몇 학생들은 노골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은 강의에 대해 비판을 늘어놓기도 했다. 남을 행복하게 해준다니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철학자들 이야기 몇 문장 들려주고 그렇게 살면 행복해질 거라 할 것으로 수업 내용을 예상하면서 시시덕거렸다. 학점만 따면 그만이라면서 말이다.
학생들은 강의가 시작되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선생을 곤란하게 하면서 그것을 즐기자고 모의하기도 했다. ‘어떻게 선생을 골려 줄까’라는 흥미진진한 상상을 전개하면서 각자 어려운 질문들을 생각해내어 메모해 두는 것 같았다.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고 한 학생이 진지한 표정을 가장한 채, 첫 번째 짓궂은 질문을 했다. 그것은 ‘행복하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어떤 대답이 나오든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는 자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강의실 내 모든 학생은 노학자의 대답에 집중했다. 학생들은 그를 어떻게 놀릴지를 생각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노학자: “그 답은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 자네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가 왜 궁금한가?”
학생: “글쎄요. 음. 선생님 수업 강의 제목대로 행복하기 위해서겠죠.”
노학자: “자네는 행복한가?”
학생: “행복이라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세상이 온통 불안한데요. 성공하지 못할까 불안하고, 친구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불안하고, 대학에 가지 못할까 불안하고, 중간고사에서 성적이 떨어질까 불안합니다. 대학에 들어와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할까 불안하고. 회사에 들어가도 진급하지 못할까 불안할 거고, 높은 자리로 진급해도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할까 불안할 겁니다. 게다가 병들까 불안하고, 죽음에 불안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할까 불안하죠. 미세 먼지와 대기 오염도 불안하고, 온난화로 기후 변화도 불안하고, 언제 전쟁이 날까 불안하고, 새로운 바이러스로 우리 삶이 다시 무너질까 항상 불안합니다. 주식을 사면 주가가 떨어질까 불안하고, 집을 사면 집값이 떨어질까 불안할 겁니다. 이런 불안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노학자: “그런가? 음, 불안의 시대군. 내가 행복하게 해주겠네.”
학생: “네? 농담이시겠죠.”
노학자: “하하, 선생이 첫 수업부터 무슨 농담이겠나! 자네도 곧 행복해질 걸세.”
학생: “어떻게 말입니까?”
노학자: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 하지만 수업을 듣다 보면 스스로 직감할 거네.”
학생: “수많은 철학자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자신했지만 모두 소용없었습니다.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죠. 선생님도 그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노학자: “물론,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들이 실패한 이유가 있네.”
학생: “네? 그게 뭐죠? 그들은 최고의 행복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평생을 걸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것 아닙니까!”
노학자: “바로 그것 때문이지.”
학생: “네?“
노학자: “이번 수업을 통해 수많은 철학이 실패한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 방법을 수업할 걸세.”
학생: “알겠지만, 믿을 순 없군요. 수천 년 동안 그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선생님이 해결하겠다고요?”
노학자: “하하, 그건 자네가 수업을 어떻게 받느냐에 달렸지.”
학생: “수업 내용은 강좌 제목인 ‘최소 행복’과 관련이 있겠지요?”
노학자: “물론이지. 최소 행복으로 시작해서 실패하지 않는 방법으로 자네를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 걸세.”
학생: “자신 있으시네요. 저도 자신 있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에 반박할 것에요.”
노학자: “그래, 젊은 패기가 훌륭하네. 수업이 진행될 때, 다음 수업에 대해 예고를 해줄 테니, 잘 생각해 와서 논리적으로 반박해 보게.”
학생: “대환영입니다.”
노학자: “천천히, 차근차근 들어야 할 걸세. 깊이 숨어 있는 답을 찾아야 할 테니 말이야.”
학생: “행복해질 수 있다면야, 물론이죠.”
노학자: “그런데 꼭 행복해야 하는 무슨 이유라도 있나?”
학생: “네?”
노학자: “꼭 행복해야겠냐는 말일세.”
학생: “그야 당연하죠. 그게 수업을 듣는 이유지 않습니까?”
노학자: “알았네. 그건 그렇다 치고, 자 그럼 지금부터 차근차근 불안의 시대, 행복을 위한 수업을 시작해 볼까? 자네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였지?”

첫 번째 수업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 행복을 위해 살지 말라

† 명예를 위해 살지 말고 명예롭게 살라 †

노학자: “명예를 위해 살지 말고 명예롭게 살아야 하네.”
이 말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물었던 학생이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학생: “네? 둘의 차이가 뭐죠?”
노학자: “명예를 위해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고, 명예롭게 사는 것은 자신에게 인정받는 것이네.”
학생: “하지만, 명예를 위해 사는 것도 돈을 위해 산다거나 그럴듯한 지위를 위해 사는 것보다는 그래도 훌륭한 일 아닙니까? 명예를 위해 사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조금 심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에게만 인정받으면 된다면, 혹시 자신만의 세계에서 오만에 빠지지는 않을까요?”
노학자: “바로 그래서 ‘명예롭게 사는 것’이 명예를 위해 사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지. 겸손을 잃으면 쌓아온 모든 명예가 무너져내리니 말일세.”
학생: “아직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럼 먼저, 명예롭게 살기 위해 제일 염두에 두어야 할 게 뭐죠?”
노학자: “명예롭기 위해서는 우선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 하네. 별을 쳐다보는 순수한 자의 맑은 눈동자처럼 말이지. 그 눈동자가 그리운 시대가 되었다네. 아이들이 그렇듯 순수는 행복의 조건이지.”
학생: “순수함이요? 순수함이 뭐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노학자: “순수함은 자신의 이익을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하네. 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키기 쉬운 일은 아니지.”
학생: “그렇겠지요. 나이가 들면 자기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익에 눈감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좋은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욕심은 자기 이익을 우선으로 하겠지요. 어떻게 우리 눈을 멀게 하는 더 좋은 것, 더 아름다운 것에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노학자: “자네는 아름다움이 뭐라 생각하나? 우리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런데,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법이네. 아름다움을 초월한 그 무엇이 있는 거지. 게다가 잘 생각해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밖에 없다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다움과 비교가 되지 않는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셈이지. 이것이 우리가 아름다운 것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일세.”
학생: “음,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요. 어쨌든, 그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명예롭게 사는 것’인가요?”
노학자: “꼭 그런 것은 아니네. 우리가 사는 이유나 목적은 수없이 많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기도 하지 않는가? 지금은 수없이 많은 삶의 목적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있을 뿐이네.”
학생: “선생님은 어느 정도 세상을 명철히 보고 있다고 생각하시죠? 그럼, 우리가 행복을 위해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으신가요? 아니, 정말 행복할 수는 있는 건가요?”
노학자: “초조한 듯 서두를 것 없네. 어차피 어둠 속에서 어둠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아침을 기다려야 하네. 어둠을 피하는 가장 어려운 방법은 태양을 쫓는 것일세. 그런데 대부분 그 방법을 택하고 결국 지쳐 쓰러진다네. 행복을 서둘러 쫓으면 비슷한 운명이 될 것이야.”
학생: “그럼, 그냥 기다리라는 건가요?”
노학자: “그냥은 아니지. 기다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네. 하나는 시간이 지나는 것을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이 순리대로 진행하도록 차분히 시간을 주는 기다림이지.”
학생: “음, 명예롭게 사는 것은 알겠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보편적으로 행복하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노학자: “일반화된 답을 알려줄 수는 없네. 진리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듯 말일세. 스스로 깨우치지 않은 진리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법이라네.”
학생: “모르시는 것 아닌가요? 만일 알고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아닌가요? 세상에 넘쳐나는 책은 모두 지혜와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 아닙니까?”
노학자: “글쎄, 책이 과연, 꼭 그럴까? 책은 아무것도 속이지 말아야 하는데 말일세. 태양이 떠오르면, 밤사이 생각한 것만큼 그렇게 감출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 그런데 책은 사실 속임수투성이네.”
학생: “네? 인류의 위대한 철학과 사상이 속임수라고요?”
노학자: “그들이 자기 생각과 철학을 어떻게 주장하는지에 따라 그럴 수도 있지.”
학생: “그게 무슨 뜻이죠?”
노학자: “다른 사람 옷은 그것이 아무리 좋아도 빌려 입지 않는 것이 좋은 걸세. 크기와 색이 자신에게 맞지 않아 어색한 법이지. 자기 생각을 일반화해 자기 생각을 따르라고 주장한다면 속인다고 말해도 잘못은 아니네.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
학생: “철학자가 자기주장을 할 수 없다면 어찌 그를 철학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도 철학자로 인정받고 계시는데, 그것은 무언가 자기 철학을 주장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노학자: “잘 들어보게. 자기주장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자신의 철학을 따라 하라는 의도가 보인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란 말이네. 어떤 생각이나 사상을 따라 연기하게 해서는 안 되네. 우아한 연기를 하는 배우를 우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말일세. ”
학생: “쉽지 않군요. 그럼, 삶과 인생의 목표는 스스로 생각해내라는 말씀이시네요. 그럼, 강의를 하실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노학자: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어떤 위대한 철학자의 사상, 절대 진리라고 생각되는 자유, 평등 같은 철학이더라도 사막에서 길 잃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물뿐이라네.”
학생: “음, 자신의 상황과 사정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삶의 목표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철학은 별로 소용없단 말이죠?”
노학자: “그렇지.”
학생: “그럼, 그 많은 철학자, 선생님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다면요.”
노학자: “자, 거기에 비밀이 있네. 철학자들 사상은 자기 목표의 기초와 배경을 제공하는 것일세. 예를 들면 어떤 철학자의 평등사상을 받아들인다면 내 삶의 목적을 평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초와 배경 그리고 그 방법으로써 평등을 적용하는 것이네.”
학생: “철학적 가치가 삶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말이네요. 그렇다면 쓸모가 조금 있어지겠군요.”
노학자: “쓸모 정도가 아니라, 자기 삶의 모습과 색채를 결정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네.”
학생: “음, 그래서 사람마다 자신의 목표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 거군요. 하지만, 자기 목표가 무엇이건 결국 행복해지는 게 최종 목표 아닌가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목표는 같은 것 아닙니까?”
노학자: “행복이 최종 목표라고 생각하나?”
학생: “돈을 버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도 모두 행복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선생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명예롭게 살아야 한다’라는 것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노학자: “우리는 어제 목표로 정한 것을 이루기 위해 오늘을 살아간다네. 행복해도 행복하지 않아도 어제의 일이지. 이처럼 행복은 항상 어제의 일이라네. 행복을 원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갇히는 셈이지.”

강의실 분위기가 조금 바뀌고 있다. 학생들은 집중하고 있다.

학생: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행복을 초월한 것이라는 말씀이군요. 그게 무엇인지 알려줄 수 없다는 말씀이고요.”
노학자: “그렇다네. 절대적 행복, 최고의 행복이랄까!”
학생: “그렇다면, 이번 수업을 마치면 우리 스스로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요?”
노학자: “그럴 수도 있겠지.”
학생: “행복을 초월한 우리 삶의 목표, 절대적 행복, 최고의 행복,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 기대는 되네요.”
노학자: “하지만, 준비가 필요하지. 어지럽지 않으려면 흔들리지 않는 대지가 필요하네.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는 아무리 배의 바닥을 견고히 해도 소용없을 걸세. 행복은 천천히 튼튼하게 만들어가야 하네. 언뜻 무언인가 얻은 듯해도 그곳이 아직 거친 바다라면 머지않아 난파되어 바닷속으로 사라질 거네.”
학생: “삶의 목적이 행복을 초월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다시 행복을 말씀하시니 어떻게 된 겁니까?”
노학자: “그것은 행복을 초월한 것이지만, 수많은 작은 행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해하겠는가?”
학생: “최소행복이론이군요. 조금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행복은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요소일 뿐이라는 말이군요. 그러니 구성적 행복을 삶의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요.”
노학자: “그렇다네.”
학생: “선생님을 보면, 철학을 공부하거니 철학자가 되어야 무언가 삶의 목표도 명확히 알 수 있고 그 방법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 능력과 사정들이 있는데, 아무나 철학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노학자: “철학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고, 철학은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네. 아무리 미천해도 인간을 위한 일을 하면 그는 이미 위대한 철학자지.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해서 철학자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일을 한다면 그는 그것으로 충분한 철학자일세.”
학생: “삶의 목적에 대한 통찰은 철학자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라는 말이군요.”
노학자: “그렇다네.”
학생: “삶의 목적에 대해 스스로 알아가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무언가 시금석이 될 만한 것은 알려주실 수 있지 않나요? 저희 같은 아직 젊은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 않습니까?”
노학자: “시금석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죽음의 순간에 도움이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우선하는 것이 좋네. 지금 비참하고 미천해도 오래지 않아 모두 같아지기 때문이지. 행복이 죽음의 순간, 최대가 되도록 그것을 목표하는 것이 좋네.”
학생: “죽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니요? 그게 뭐죠?”
노학자: “죽음의 순간, 무엇을 가장 아쉬워하겠나? 돈이 없음을 아쉬워하겠나, 명예가 없음을 아쉬워하겠나?”
학생: “죽음의 순간에 그런 것들은 생각도 나지 않겠지요.”
노학자: “죽음의 순간에 떠오르는 것들은 아이들의 행복한 웃음, 멋진 대화, 집 앞에서 본 작은 개구리, 이런 작은 것들, 따뜻한 것들, 밝은 것들이 우리 죽음을 위로해주는 것이네.”
학생: “그럼 죽음의 순간, 도움이 되는 것이 그런 작고 소박한 것들이란 말이네요. 반행복적 최소행복이군요. 결국, 삶의 목표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요?”
노학자: “그럴 수도 있지만, 또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네. 생각이 모여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모여 삶이 되기 때문이지. 행복도 마찬가지고.”
학생: “삶의 목적을 아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군요.”
노학자: “그렇네. 행복의 조건은 끊임없는 행동, 자기 창조적 행동일세. 인간의 행복이 지속되려면, 태초에 신이 창조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창조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지.”
학생: “행복에 여러 가지가 작용하고 있군요. 선생님 말처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삶의 목적에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가 많겠지만, 우리 삶 속 ‘억압과 다툼’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아무리 삶의 목적에 다가서고 싶어도 억압과 다툼 속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니까요.”
노학자: “잘 생각했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쉽게 행복할 수 없는 이유지. 그런데, 억압과 다툼을 ‘권력과 민중’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네. 그 근원은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 사이의 문제, 바로 우리의 문제지. 문제의 근원이 자존감으로 무장한 ‘나’일 수 있네. 자존감이 거만함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지.”
학생: “그렇군요.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책과 매체를 통해 삶의 목적과 행복에 대해 들어왔습니다. 지금 아직 젊은 우리로서는 모든 말들이 다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중에서 어떻게 옥석을 가려야 하는 거죠?”
노학자: “우리 시대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귀를 막고 다니는 것도 중요하네. 행복은 돌아다니는 지식과는 전혀 무관하지. 만일 그런 돌아다니는 지식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야 하겠지.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행복한 사람은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걸세. 옥석은 그렇게 쉽게 가릴 수 없는 거네.”
학생: “그렇긴 합니다. 저도 유튜브 같은 곳에서 무언가 열심히 찾아 들어도 볼 때만 잠시일 뿐, 내 삶에 무언가 근본적 변화를 주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언뜻 그럴듯하게 나를 꾸며 보기도 하지만, 조금 지나면 전혀 소용없습니다.”
노학자: “그럴 걸세. 다른 사람을 다 속여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런데 보통 그것을 알아채는 ‘나’는 조금 늦게 등장한다네. 물론 의도적이지. 모르는 척 말일세. 행복해 보이려 하지 말게. 행복한 것과는 다른 이야기니.”
학생: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후회스럽거나 불행한 과거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경우,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건가요? 후회스러운 과거, 불행한 과거 때문에 행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노학자: “물론,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사람은 보통 미래를 창조하거나 아니면 현재를 창조한다네. 하지만, 행복한 자는 과거를 창조하지. 보잘것없던 과거도 현재에 의해 재탄생한다네.”
학생: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과거는 이미 고정된 사실이고, 창조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이미 고정된 불변의 사실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노학자: “언뜻 보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여기서 과거를 창조한다는 것은 현재의 노력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의미와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네. 어떤 후회스러운 과거의 일도 그 ‘의미와 가치’를 바꿀 수 있는 거지.”
학생: “조금 알 것도 같은데, 다른 구체적 예가 있을까요?”
노학자: “예를 들면 초등학교 시절 신나게 놀기만 하고 했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이 형편없이 나왔다고 해보세. 그 학생이 초등학교 시절 너무 놀기만 한 것을 후회하고, 그 시절을 바꾸고 싶은 과거로만 생각하면 과거는 고정되어 버리지.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놀았던 사실을 인정하고, 지금 ‘현재의 노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그 균형을 맞추어 간다면, 초등학교 시절 놀기만 했던 과거의 사실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의 시기로 재탄생하는 것이네.”
학생: “음, 좀 어렵지만, 과거를 창조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두려움 없이 할 수는 있겠네요. 아무리 그 결과가 나쁘더라도 또 다른 현재의 노력으로 그 의미와 가치를 재탄생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노학자: “핵심을 잘 파악했네.”

† 이제 무대에서 내려와라 †

이때, 수업을 듣던 다른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
학생: “삶의 목적, 최고의 행복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듯하군요. 그런데 우리는 모두 예정되어 있는 비슷한 길을 가고 있고, 경쟁 속에서 승자는 행복하고 패자는 불행하게 됩니다. 삶의 목적과 행복도 어쩌면 이 경쟁 속 승자가 되는 것 아닐까요?”
노학자: “일견,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행복하려면 반대로 이제 무대를 내려와야 할 걸세. 우리 삶 속 예정된 극본은 보통 엉터리이고 삼류 작가가 써 놓은 대본이 대부분이네. 게다가 극본을 따르는 ‘배우’는 감독과 관객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지.”
학생: “무대를 내려오라니, 그건 경쟁의 무대에서 내려오라는 말인가요? 아무리 삼류 작가가 쓰는 듯한 뻔한 이야기, 뻔한 길일지라도 그것을 포기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요? 뻔한 길이라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뻔한 길이지만 결혼하고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행복 아닌가요?”
노학자: “자네 말도 분명히 맞는 말이네. 써 놓은 각본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 평범하게 살지 말라는 것은 아닐세. 내가 하는 말은 삼류 작가들이 써놓은 뻔한 내용대로 살려고 억지로 무대 위에서 연극하듯 살지 말라는 말이라네. 자신의 무대와 연기에 관객들이 환호할지는 모르지만, 그건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일세.”
학생: “음, 대본에 맞추어 연기하듯 살지 말라는 말이군요. 하지만 그 연극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노학자: “물론이지. 만일 그렇다면 그는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 네. 그에게는 무대 위가 진짜 삶인 거지.”
학생: “그렇군요. 연기 말고 진짜 자기 삶을 살라는 말이군요. 결국, 진부하지만, 다른 사람들, 관객 의식하지 말고,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행복을 이루는 길이란 말이죠?”
노학자: “반만 맞았네. 자기 생각이 다수로부터 지지받지 못한다면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보면 되지. 행복은 일정 부분 다른 사람의 인정도 필요하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살되, 그것이 그들에게 인정받을 만해야 하는 걸세.”
학생: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말되 그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삶을 살라? 애매하군요.”
노학자: “신이 세상을 창조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매일 아침 자기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네.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지. 하지만, 자기만의 세상이 다수의 지지를 받을 만해야 하는 것이네. 자기만의 세상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범죄적 삶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학생: “물론, 그렇겠죠. 다수에게 인정받는 자기 세계 창조! 어려울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냥 자기 삶을 살면 되는, 쉬운 일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세계를 만들면 자기만의 가치, 자기만의 철학을 만들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꽤 자랑스럽게 생각할 만하겠습니다.”
노학자: “자랑할 건 없네. 진리는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내가 진리를 만든 것도 아닌데, 그것을 찾았다고 너무 자랑할 것 없지 않겠나? 자신의 자랑스러운 지혜도 타인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법이라네.”
학생: “네? 진리가 원래부터 있는 것이란 말인가요?”
노학자: “그렇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할 뿐이지.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 속 질량과 에너지 변환 공식 E=mc2을 아인슈타인이 처음 만든 것이겠나? 그는 우주 속 원래부터 있던 공식을 발견했을 뿐이라네.”
학생: “이 세상 모든 위대한 성취가 모두 발견일 뿐이군요. 그렇다면 이 우주 속, 세상 속에는 무한한 보물이 숨겨져 있고 그것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노학자: “그렇지.”
학생: “그렇다면 삶의 목표를 새로운 원리나 법칙 발견을 위한 지식 탐구에 두는 것도 괜찮겠네요.”
노학자: “법칙 발견을 위한 지식 탐구는 혁신적 진보를 위해 중요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혁신적 진보가 오히려 인간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전조를 이미 심각하게 경험하고 있지 않나! 지식으로 오만해지지는 말아야지. 과다한 지식은 겸손을 갉아먹어 진리의 길에 울타리를 높게 세운다네. 겸손치 않으면 지나가는 가을바람도 그를 외면할 것이야. 오만하지만 않으면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지. 삶의 목표가 단순히 지식과 진보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일세.”
학생: “반행복적 최소행복이론이군요. 하지만, 선생님도 지식인이자 학자이지 않습니까? 지식을 추구하여 새로운 진리와 혁신적 법칙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뭐가 있나요? 우리 행복과 삶의 목표가 지식이 돼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해 못하겠습니다.”
노학자: “자네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지식을 추구하고 완성해가면서 겸손을 잃지 않기란 동네 뒷산에서 산삼을 캐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지. 보통, 학자인 척하는 자는 대부분 오만해진다네. 그에게 존경할만한 것은 기억력뿐이지. 이것이 지식만으로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이유일세.”
학생: “지식이 쌓여갈수록 사람은 오만한 태도를 버릴 수 없다는 말이군요. 듣다 보니 행복은 지식만으로는 안 되고, 무언가 또 다른 것이 함께 필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노학자: “그렇네. 지식만으론 아무것도 아니지.”
학생: “혹시,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삶의 목표가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닌가요?”
노학자: “그럴 수 있네. 사람들과의 관계도 삶의 목표와 행복에 충분히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기는 하지. 하지만, 교제술에 능숙하려면 자신에게 나태해지지 않을 수 없다네. 물론,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그렇지만 그것을 너무 중시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아질 걸세.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네.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고 타인은 단지 도울 뿐이니까.”
학생: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행복과 삶의 목표에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노학자: “그렇네.“
학생: “아, 그럼 ‘편안함’은 어떤가요?”
노학자: “왜 그렇게 생각하나?”
학생: “행복은 어쩌면 대단한 즐거움과 기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편안함이 오히려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은 스치듯 지나가 버리니까요.”
노학자: “중요한 관점을 파악한 것 같군. 그렇네. 순간적 행복은 진정한 행복은 아니지. 하지만 우리는 편안하지 않은 고행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나? 자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걸세. 편안함은 행복과 삶의 목표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네. 오히려, 삶에 편안함이 깃들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 편안함은 마음으로 충분하다네.”
학생: “이러다가는 데카르트처럼 아닌 것을 모두 부정, 제외하고 남는 것만 따져봐야겠습니다. 행복하기 위한 삶의 목적에의 접근이 쉽지 않군요.”
노학자: “쉽다면 벌써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살았을 테고 세상도 이미 그렇게 바뀌었겠지.”
학생: “그래도 행복을 깨달은 위대한 정신적, 사상적 교육자들이 있었을 텐데, 왜 그들은 우리에게 그 비밀을 알려주지 않을까요?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 그런 교육자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같긴 하네요. 아니, 잘 띄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는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누구도 삶의 목적과 행복을 위한 진리를 직접 알려주실 수 없다고 말씀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교육자가 있다면, 어느 정도 그 방향을 제시해 줄 수는 있을 텐데요.”
노학자: “우리 시대는 위대한 스승을 두려고 하지 않네. 어리석도록 자존감으로 무장한 머리 좋은 사람들의 질투심 때문이지. 아니, 이는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닐세.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운명이었으니까.”
학생: “질투심?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노학자: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그들을 압도하는 뛰어남이 필요한 법이네. 때때로 그런 교육자가 있기는 하지. 하지만, 뛰어난 자들은 그들을 좋아하지 않네. 아니, 증오하지. 주위에 교육자가 적은 이유라네. 이처럼 탁월한 교육자가 줄어들면 곧 행복도 줄어들 걸세.”
학생: “뛰어난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심이 세상을 망가뜨린다고요?”
노학자: “그런 셈이지.”
학생: “그런데, 그 ‘어리석게 뛰어난 자들’은 왜 탁월한 사람들을 질투하고 증오할까요? 자기 자리를 넘볼까 봐, 자기 자리가 위태로울까 봐 그런 것일까요?”
노학자: “그런 면도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자네가 말한 표현 그대로 ‘어리석게 뛰어난 자들’이 정말 뛰어난 자들은 아니네. 평범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 세상에 적응하면서 진화한 적응형 인간이라고 보는 게 좋을 걸세. 이런 군중 속 자아 상실자는 겉으로는 누군가의 다름을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그들을 어떻게 동화시킬지를 궁리하지. 그의 특징은 다수를 따르는 자신에 대하여 의외로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이네. 다수에 속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은 절대 아닌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지.”
학생: “자신과 다른 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거네요. 그들을 다수 속에 숨어 누리는 행복의 방해꾼처럼 느끼고요.”
노학자: “그렇다네. 그런 가축 떼 속 군중심리는 원래 군주나 독재자들의 통치 수단이었지. 서로를 감시하여 통제를 벗어날 수 없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말일세.”
학생: “삶의 목적이나 행복이 점점 미로에 빠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도 계속 열심히 찾다 보면 행복하기 위한 철학이나 자기주장을 만들 수 있겠지요?”
노학자: “물론이지. 하지만, 고정된 자기주장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그렇게 되면 세상이 모두 적군뿐이고 상대하여 항복시켜야 하기 때문이지.”
학생: “자기주장이나 자기 철학마저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을 살라는 말 아닌가요?”
노학자: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군. 자기주장이나 자기 철학이 왜 필요 없겠나. ‘고정된’ 자기주장이나 철학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네. 특히 젊은 시절, 세월의 깊이가 스며들지 않은 철학은 머릿속에 있는 몇 개의 멋진 문장을 자기 철학으로 미화하기 쉬운 걸세. 암기하려면 철학은 공부하지 않는 것이 좋네. 우스운 생각의 소유자가 될 뿐이지. 잘못된 자기 철학은 행복을 차버린다네.”
학생: “고정된 자기 철학 말이군요.”
노학자: “그렇네.”
학생: “그럼, 자기 철학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행복을 위한 삶의 목적은 그래도 무언가 눈에 띄는 성취를 지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성취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행복하려 해도 삶이 초라하다면 어찌 행복하겠습니까?”
노학자: “물론, 너무나 초라한 삶이라면 행복할 수 없겠지. 하지만 빈천하지 않고 청빈하다면 멋진 삶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걸세.”
학생: “빈천과 청빈이요?”
노학자: “빈천은 가난해지면서 생각도 행동도 천해지는 것이고 청빈은 가난하지만 생각과 행동이 항상 올바르고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네. 둘은 완전히 다른 삶이지.”
학생: “또 최소 행복이군요. 그건 가난한 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변명거리 아닐까요? 재벌 사장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자의 행복은 분명히 그 차이와 격차가 있는 것 아닌가요?”
노학자: “부의 관점에서는 자네 말이 틀림없겠지.”
학생: “부는 할 수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감을 줍니다. 입에 침이 돌게 하는 부드러운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입으면 자신을 더 아름답게 하는 세련된 옷을 살 수도 있고, 놀고 싶을 때 마음대로 쉴 수 있는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부는 단지 부가 아니라, 우리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노학자: “그래, 자네 말이 틀리지 않네. 그렇다면 최고 행복을 위한 삶의 목적이 부라고 할 수 있겠나?”
학생: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노학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세. 그는 최고 행복을 위한 삶의 목적을 이미 이룬 것 아니겠나?”
학생: “그럴 수도 있겠죠.”
노학자: “그 재벌 아들이 사업에 바쁜 부모의 세심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면, 항상 사랑에 목말라하면서 사랑을 자신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학생: “그럴 수는 있겠지요.”
노학자: “어느 정도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된 예술가나 문학가는 어떨까? 그들에게도 부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최고의 행복은 역사에 남을 예술적, 문학적 성취에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나?”
학생: “그건 그렇죠.”
노학자: “이처럼 최고의 행복은 세상 사람 모두 다르다고 봐야 하지. 하지만, 달라도 별 상관없네. 향나무로 만든 사자와 여우는 그 향이 다르지 않을 걸세. 행복은 향과 같지. 그 모습은 상관없네.”
학생: “아, 그러면 최고의 행복을 위한 삶의 목적은 그 향을 찾는 것이겠군요.”
노학자: “그건 자네가 알아서 생각하게.”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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