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부당함을 항의하던 남자는 반복되는 폭력과 회유 속에서― 마치 폭력가정의 여자들처럼― 결국은 체제순응적이 된다. 바로 그 순응(제도화)과정을 여자는 은밀히 관찰하고 기록한다. 감금된 남자가 「텍스트」가 되고, 이 모든 과정이 저자의 「글쓰기」와 연결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이 작품에서 과연 여자는 내내 자신의 「텍스트」를 관찰하며 글을 써 나가고 있다.
--- p.5
이 상을 받게 되면, 자신의 배우기질을 인정받게 되면, 끝없이 계속되는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잠시라도 멈출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라면 기쁨일 것이오. 말하자면 내면의 싸움에 휴전이 선포된다고나 할까, 스스로에게 다소 너그러워지면서 평화도 얻고 용기도 충전하고, 그런 다음 다시 온몸을 바쳐 영화판에서 뛰는 것이라오. 어떤 상이든 다 격려의 의미가 가장 많은 것 아니겠소?
--- p.255
삶은 곡예이다. 맞는 말이다. 삶이란 아무리 다른 수식어를 달아도 인수분해를 해버리면 곡예의 곱하기, 또 곱하기 인 것이다. 누구의 삶도 인수분해 할 수 있다. 외출타기 곡예사가 외줄과 대결하듯이 인간도 삶도 외줄과 대결한다. 이 대결에서도 절망은 타기해야 할 대상이다. 대결자들은 멀리는 보지만 굴러 떨어질 나락을 보아서는 절대 안된다. 이미 대결을 시작되었고, 남은 것은 이기는 일 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
- 강민주의 노트에서
--- p.96
그러나 남자 쪽에서는 나의 얼굴을, 아니 나의 모습 전체를 아주 잘 관찰할 수 있는 위치였다. 나는 잠시 우리 둘의 이 구도를 바꿀 생각을 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이 주홍의 부드럼운 색조를 거스르면서까지 새삼 ㅟ압적일 필요는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지금부터는 부드럽고 인간적인 강민주의 모습을 보여줄 차례였다. 이런 순서는 내가 개발한 것이 아니었다.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이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이같은 억압과 회유의 반복이 이미 보편화된 통치의 기술로 되어 있는 것이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이 기술이 전폭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가 상담소에서 채집한 가정폭력의 거의 일백 프로가 모두 이 악순환을 밝고 있었다. 하루는 실컷 아내를 두들겨 팬 남편이 다음날에는 상처를 치료할 약과 아내에게 바칠 선물을 사들고 들어와서 눈물겹도록 지극한 정성으로 아내의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다. 더욱 희한한 것은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사는 아내의 거의 대부분이 바로 이 회유의 단꼐에서 어김없이 남편을 용서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그런 남편들이 지배하는 사회, 우리의 정치사 또한 고스란히 이 병주고 약주기 수법을 남용하소 있지 않았던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근대사만 더듬어 보아도 그 흔적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는 특효처방으로 굳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통치자들은 이 방법을 선호하고 있다.
--- p.182-183
그 꿈은 딱히, 남성의 반성만을 촉구하는 꿈도 아니고, 여성을 깨우는 꿈만도 아니며, 작가의 마대로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길 바라는 꿈이다. 이 소설을 읽고, 그 능동적 꿈에, 독자여, 깊이 침참해 보지 않겠는가..
--- p.324-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