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뉴욕, 에른스트홀.
탕!
메마른 총성,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 소리, 그리고 기민하게 움직이는 훈련된 남자들.
탕!
순식간에 회의실을 넘실대던 혼란이 갈 방향을 정하지도 못했을 때 두 번째 총성이 울렸다.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발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간에 비명 같은 외침이 울렸다.
“저기다!”
누가 소리쳤는지 확인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시선이 ‘저기’를 찾기 위해 휘돌았다. 그리고 방향을 정한 지올리아니의 패거리들이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갔다.
한밤의 뉴욕, 메인 스트리트. 한 여자가 휘청대는 조명 속을 발랄한 걸음걸이로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여자는 얼핏 봐도 몹시 어려 보였다. 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걱정될 정도로. 그러나 여자는 사람들이 많은 메인 스트리트를 무심히 지나 이윽고 조명이 사라지는 한적한 거리로 접어들었다. 그 거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우범지대였으나 여자는 익숙한 듯 망설이는 기색 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한층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밟았다. 아니, 밟을 뻔했다.
“……?”
여자는 엎드린 채로 코를 땅에 박고 있는 남자를 굽어보았다. 죽었나?
이 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총성이 들리는 곳이다. 누군가 죽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고, 또 그 시체가 그냥 내버려져 있다고 해서 놀랄 이유도 없다. 그저 나무토막을 만난 것처럼, 아니, 나무토막은 아니니까 기도 한 번 해주고 폴짝 건너뛰어 가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귀찮게도 남자는 죽어 있지 않았고, 그녀가 굽어보는 동안 눈을 뜨고 몸을 뒤집었다. 애써 움직이는 남자의 검은 머리가 한숨처럼 흔들렸다.
“살아 있나요?”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당황했다. 시체라 생각했다면 질문할 이유도 없을 텐데.
“……이름이 뭐예요?”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여자가 질문을 바꿨다. 그러나 이번 질문도 조금 이상하다. 죽어 가는 남자의 이름을 알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신문에 난 이름을 보면서 ‘난 이 남자가 살아 있는 모습을 보았지.’ 하고 자랑하는 것 외에.
남자는 여자의 담담한 어투가 어이없어 자신의 부상이 보이지 않나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너무나 선명한 핏자국, 눈뜬 자는 보지 못할 수가 없는 부상의 흔적을 말이다.
“시드, 시드 고든.”
여자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만 있었기에 결국 그는 대답했다.
“집이 이곳인가요?”
“그렇……습니다만.”
“데려다 주죠.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남자는 이제 황당했다. 죽어 가는 순간에도 황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무서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총에 맞은 사람을 보고 저리 담담하게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는 여자라니. 태연스럽게 호구조사를 하더니 집이 가깝다면 데려다 주겠노라 말하는 여자는 몹시도 이상하다. 정상적인 반응이란, 비명을 지르거나 경찰을 부르거나……. 물론, 그녀가 정상인이 아니란 것이 이번 경우에는 행운이지만 말이다.
여자는 바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다만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헤어지면 다시 못 볼 연인을 보듯 정말이지 애틋하게 쳐다보았을 뿐이다. 눈을 질끈 감은 여자가 아이스크림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를 물끄러미,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남자는 아이스크림을 버리곤 자신의 아이를 버린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진정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그걸 표현할 기회는 없었다. 안타깝게 입맛을 다신 여자가 남자의 기분은 상관없다는 듯이 그의 팔 아래 자신의 어깨를 끼워 넣었기 때문에. 그리고 예상외의 강한 힘으로 남자를 치켜 올렸다. 작은 몸집에 비해 대단한 힘. 운동깨나 한 여자임에 틀림없다. 남자는 예리하게 여자를 판단했다. 보이는 것보다 나이는 많을 것이다.
“집이 어디예요?”
“맨해튼 5번지 마드리드 센터.”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멀잖아!
여자는 남자의 몸을 숙여 어깨 아래에서 몸을 뺐다. 덕분에 갑자기 텅 빈 공간을 감당하지 못한 남자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털퍼덕 널브러지자 조금쯤 무감각해졌던 상처가 들쑤신 듯 날뛰기 시작했다. 남자는 간호사는 절대 못 될, 환자를 다루는 법을 전혀 모르는 여자를 황망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여자는 남자를 잠시 노려보다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타박타박 멀어지기 시작했다. 길게 흔들리던 여자의 그림자가 이윽고 코너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자 남자는 깨끗이 포기하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눕기 위해 노력했다. 어차피 혼자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곳까지 피한 것도 꽤 운이 좋았던 것이니까.
총알은 다행히도 관통한 것 같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아마 뼈도 좀 상한 듯하다. 눈을 감고 있던 남자의 감각에 발짝 소리, 기척을 채 지우지 못한 자들이 걸렸다. 남자는 중얼거렸다. 제기랄!
“일어나요.”
그는 정말이지 화들짝 놀랐다. 몸을 움직일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면 그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해주었을 것이고, 정신적인 여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자신이 방금 기절했었던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힘도 여유도 없는 지금 그는 그저 멍하니 눈을 떠 여자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여자의 목소리는 정말 한순간 벼락처럼, 어떤 기척도 내지 않고 갑자기 들려왔다. 오히려 더 선명한 것은 그에게 다가오려다 어둠으로 도로 숨어 버린 자들의 기척. 눈을 들자 그의 옆에는 심통 나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고, 골목길 끝에는 택시가 서 있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기사가 밖에 나와 서 있다.
“여기서 맨해튼이 얼마나 먼 줄 알아요? 나중에 택시비는 돌려줘야 해요.”
여자는 선언하고, 엄청난 힘으로 남자를 부축해 택시에 집어넣었다. 택시 기사가 단박에 눈살을 찌푸렸다.
“시트가 더러워지면 곤란합니다, 손님.”
“어차피 더러웠어요.”
무심히 대꾸한 여자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한 택시 기사는 맨해튼으로 차를 몰았다.
간발의 차로 늦어 버린 검은 옷의 남자들이 입술을 깨물며 어둠 속에서 나와 사라지는 택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제기랄!
잠시 택시의 뒤꽁무니를 노려보던 남자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으음…….”
몸을 뒤척이던 시드는 찌르는 듯한 통증에 눈을 떴다. 과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눈을 뜬 곳은 자신의 아파트였다. 확실히 그렇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조용하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욱신거리는 가슴을 탄탄히 잘 감아진 붕대가 받치고 있다. 꽤 능숙한 솜씨.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이 감았잖아.”
시드가 중얼거렸다.
“원래 그런 게 더 좋은 거예요.”
시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을 열고 그 안의 권총을 잡았다. 그러나 그 총을 꺼내기 직전에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파악했고, 손에서 힘을 풀었다. 어제 봤던 그 여자다. 조그맣고, 힘이 센. 서랍이 스륵, 하고 닫혔다.
“움직이기 조금 불편하겠지만, 적당히 감아 줘야 힘을 받는 법이거든요.”
신문을 손에 쥐고 있던 여자가 신문을 던지고 거리낌 없이 다가와 시드의 붕대를 확인했다. 그 움직임이 마치 조그맣지만 이를 가진, 발톱을 세운 야생 동물 같다. 알 수 없는, 황홀하기까지 한 유연함.
“당신이 감은 겁니까?”
시드는 허리를 굽히고 붕대를 살피는 여자의 말간 정수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옷도……, 당신이 갈아입힌 겁니까?”
“여기 저 말고 누가 또 있나요?”
……이런, 제길. 시드는 자신이 바지는 물론 속옷까지 갈아입혀졌음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는 거지?
“어쩔 수 없었어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거든요. 다른 상처가 있는지도 확인해야 했고, 또 수혈도 해야 했고…….”
“수혈이요?”
시드는 놀랐다. 수혈이라고? 그러고 보니 아직 피 찌꺼기가 말라붙은 혈액 팩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다. 설마, 저 여자……?
“자격증은 없어요. 야매죠.”
야……매? 야매가 뭐지?
“수혈까지 했다는 겁니까?”
“네, 병원에 가길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총상이죠, 그거?”
“대답할 의무 없습니다만.”
“물론 그게 궁금하다는 건 아니고요…….”
여자는 간단히 대답하고,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치료비와 어제 택시비, 그리고 내 옷에도 피가 묻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사 왔어요. 그 돈 위에 입막음비 주세요.”
시드는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옷이 바뀌어 있다. 어제는 검은 바지에 녹색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청바지와 흰 티셔츠를 입고 있다.
“어, 얼마입니까?”
“택시비가 100달러, 옷 산 돈이 200달러, 치료비가 1,000달러에 입막음비로 3,000달러. 저렴하게 4,200달러만 하죠. 싸다!”
시드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참았다. 불리할 때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녀는 어쨌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조금 뻔뻔하고 말이 안 된다고 해도, 뭔가 억울하게 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해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이를 악물고 지갑을 꺼내 4,300달러를 꺼내 주었다. 100달러라도 빚지고 싶지 않다.
“자존심은 있어서……. 자존심을 세우려면 5,000달러를 꺼내 줘야지 4,300달러만 꺼내 주는 건 뭐예요?”
꼼꼼하게 세어 본 여자가 비웃고 뒤돌았다. 시드는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별것 아닌데, 여자의 별것 아닌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신경을 자극한다. 이럴 때는 얼른 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이 낫다. 소동은 질색이니까.
욱신거리는 몸을 풀어 주던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돈을 받고 미련 없이 돌아선 여자의 춤을 추는 것처럼 가벼운 뒷모습이었다. 한가한 듯 여유롭게 문으로 향하는 여자의 움직임이 어딘지 마음을 잡아끌었다. 문득 자신이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는 것이 떠오른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서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또 만날 것도 아닌데, 알아서 뭐 하려고요?”
여자가 퉁명스럽게 내뱉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상자가 여자의 작은 몸을 삼켰다. 시드는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가만히 닫혀 버린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그의 생명을 구하고, 돈 4,300달러를 뜯어 간 여자가 사라진 문을.
그렇게, 운명이 또 한 번 부딪치고 사라졌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