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국위 선양’이니 ‘희망의 메시지’니 하는 말로는 우리에게 야구가 가지는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한국인들이 백 년 이상 야구를 사랑하고 삼십 년 넘게 ‘프로야구’라는 나무를 키워 온 가장 큰 보람은, 이 땅과 이곳의 자연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야구가 지켜 준 데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부산 갈매기〉와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낯선 이웃과도 푸근하게 어깨동무하게 하고, 고층 빌딩 숲 대신 파란 잔디밭이 주는 행복감을 잠시나마 꿈꾸게 해 준 것이 야구 아니었던가. 그러니 야구마저 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그리고 그곳에서 아침마다 좁은 버스와 전철 안에서 민망하게 부대껴야 하는 이웃들에게 애틋한 연대감을 느껴 볼 시간이 언제 다시 있었겠는가.---p.6
한용단이 주말마다 일본인 팀들을 웃터골로 불러서 벌이는 야구 경기는 식민지 백성의 고된 삶에 순간이나마 포효하고 열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고, 갯마을 제물포의 어시장 상인들은 얼른 내다 팔아야 할 생선이나 조개 따위를 짊어진 채 넋을 잃고 응원을 하다가 물건 썩는 줄도 몰랐다는 풍문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한용단은 야구라는 생소한 종목의 결전장으로 구름 떼 같은 관중들을 끌어내기 시작했고, 그런 열기에 힘입어 일본 기업과 상점 직원들로 구성된 야구팀들은 일본 본국에서 유명 선수들을 영입해 가며 전력을 강화하는 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야구 열기’라는 것이 불붙기 시작한 곳은 그렇게 인천이었다.---p.28
김선웅과 박현덕. 학생 시절부터 야구 선수로서 나란히 이름을 날렸고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전인천군’이라는 사회인 팀에서도 같이 활동하던 두 사람을 지도자로 영입한 인천고(인천상업중)와 동산고(동산중)는 마치 자매 팀처럼 나란히, 그리고 착실히 성장해 갔다. 야구장에서는 ‘혈서를 써 가면서까지’ 반드시 꺾고자 한 적이었지만, 야구장 밖에서는 두 감독이 매일 붙어 앉아 더 효과적인 지도법과 훈련 방법을 연구하고 의논하는 동료였기 때문이다. 싸워 가며 도와 가며 함께 성장하는 ‘선의의 라이벌’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면 그 가장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준 것이 바로 초창기 인천고와 동산고 야구부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p.53
특히 청룡기에서 대회 3연패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대회 규정상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한 학교가 청룡기를 영구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을 수놓아 만든 청룡기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전국 학생 야구 대회 우승의 상징물이었고, 전쟁이 터지기 일주일 전에 끝난 결승전에서 이기면서 청룡기를 차지한 대구상고의 김종경 감독이 시시각각 밀려드는 공산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투수판 밑에 땅을 파고 묻었다가 다시 꺼내 교장 사택에 숨겼다가 다시 창고로 옮겨 특별히 나무 관을 만들어 숨기기를 반복하는 전전긍긍 끝에 지켜 낸 우여곡절의 산물이기도 했다.---p.72
인천고와 동산고가 우승컵을 주고받으며 전국 야구의 최정상에 군림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인천항을 드나들던 미국인과 일본인들이 뿌려 놓은 씨앗 위에 한용단이 싹을 틔운 야구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 터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몇 가지를 덧붙여야 완성된 답이 될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부대의 존재였다.---p.78
인천 야구의 하락세를 지역 경제의 침체만으로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침체’라고는 해도 같은 시기에 빠르게 성장하던 부산이나 대구에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부진’이라는 의미일 뿐, 급팽창하던 서울의 부속 도시라는 의미만으로도 인천은 꾸준히 성장하는 대도시였고, 야구 지망생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어느 곳에서나 그렇듯 그 꾸준한 성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투자는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줄어드는 반면, 그 표면적인 인기에만 마음이 팔려 피운 호들갑이 그 성장의 동력을 갉아먹고 하락세를 부채질했다는 점을 지적해 볼 필요가 있다.---p.95
1981년 봄 청와대 수석 비서관 회의에서 기획된 프로야구는 그해 연말에는 여섯 개의 구단을 뚝딱 만들어 냈고, 그 구단들이 바로 다음 해 봄에 정규 시즌에 돌입했다. 요즘이라면 최소한 5년은 걸렸을 일이 대여섯 달 만에 마무리되어 버린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프로야구 출범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무렵 ‘청와대의 뜻’이라는 서슬 퍼런 으름장을 피해 갈 배짱이 대기업들에게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고, 그다음은 프로야구 출범을 기획한 이용일, 이호헌의 ‘지역 연고제’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들은 모두 한 팀에서 수용하도록 하는 구상이었는데, 그럼으로써 선수 수급에 관한 혼선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고, 팬들의 관심과 응원 역시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p.110
“감독님이 선수 시절에 워낙 슈퍼스타셨잖아요. 투수로서도 최고였고, 타자로서도 최고였고, 또 포수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삼미에서 선수들이 얼마나 성에 안 차셨겠어요. 그래서 식사 때마다 혼잣말하듯 푸념을 했어요. ‘광이 없어, 광이. 광이 한두 장이라도 있어야지, 어떻게 맨 흑싸리 껍데기만 들고 화투를 치나’ 하고.”(조흥운,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 멤버)---p.115
“그때, 감독님이 날아차기를 해 가지고 말썽 났던 다음 날, 아마 부산 원정 갔을 때인 것 같은데, 게임 끝나고 나서 검은 양복 입은 덩치 좋은 사람들이 몇 명 왔어요. 선수들이 감독님 못 보낸다고, 방망이 들고 막았지. 그런데 ‘어르신이 보내셨습니다. 같이 가셔야죠’ 하더니 무슨 손수건 같은 걸 감독님 입에 살짝 대니까 감독님이 의자 위로 풀썩 주저앉더라고요. 그게 무슨 약이 묻어 있어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끌려가셨어요. 끌려가시고 나니까 아무래도, 선수들이 기가 죽었지. 대장을 잃었으니까.”(김경남)---p.142
김성근 감독은 ‘탈꼴찌’가 아니라 매 경기 ‘이기는 것’을 목표로 뛸 수 있는 ‘정상적인 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패배주의’야말로 그 팀의 문제였고,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탈꼴찌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야구도 삶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첫 시즌 전 겨울, 해외 전지훈련을 떠난 다른 팀들과 달리 오대산에 훈련 캠프를 차렸다. 구단의 지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오대산 훈련에 필요한 훈련 경비도 구단의 지원 일절 없이 선수들이 직접 십시일반 모아서 충당하도록 했다. 각자 배낭에 쌀이며 김치며 고추장 따위를 나누어 준비해 오도록 한 것이었다.
오대산 곳곳에서 선수들은 하루 열 시간씩 산과 씨름했고, 땀에 젖은 몸은 얼음을 깨고 들어가 계곡물로 식혔다. 그리고 그렇게 격한 고통과 맞부딪쳐 꿈틀대는 몸 안에 담긴 정신을 담금질했다.---p.154
SK텔레콤 홍보실장 출신으로 2002년 시청 앞 광장 거리 응원 열풍을 만들어 내기도 했던 재기 넘치는 홍보맨인 신영철 사장이 와이번스에 부임한 것은 2005년이었다. 그리고 그가 칼을 빼든 것은 2007년이었다. 2년간 ‘현장 파악’을 마친 그는 “성적이 나면 팬들도 모일 것으로 기대하며 기다리는 천수답 경영을 벗어나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스포테인먼트’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특이하고 생소한 표현이었지만, 야구단 역시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운영해야 한다는 너무나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생각을 담은 말이었다. 손님(관중)을 만족시키기 위한 야구장 시설 개선, 직원들의 서비스 마인드 개선, 지역민과 밀착하고 유대감을 키우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역민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야구.---p.186
오면 가고, 가면 오는 것. 문득 가고 오지 않는 비극이 숨어 있어 늘 긴장하고 안타깝지만, 또 오랜 세월을 두고 보면 흘러가고 반복되고 대체되는 것. 항구의 삶이 그렇듯 야구 역시 그랬기에 인천은 야구의 도시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출루한 주자 하나를 돌아오게 하기 위해 보내기번트를 대고 도루를 하며 기를 쓰지만, 정작 득점은 병살타로 휑하니 비워 둔 다음에야 터져 나온 시원스런 홈런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 야구. 그리고 ‘구도(球都)’로 시작해서 ‘꼴찌’로 전락했지만 다시 ‘최강 전설’로 거듭나기도 했던 인천 야구. 그래서 매일 똑같은 파도가 치는 허무한 바다에서 오히려 한 순간도 활력을 잃지 않는 것이 신기한 부둣가의 사람들과, 날마다 해마다 똑같은 공놀이에 평생 울고 웃는 야구팬들의 모습.
야구는 무엇이고, 인연은 무엇이며, 삶은 또 무엇인가. 말해 다오, 말해 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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