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의 일상 속에는 항상 꽃이 있다. 그래서인지 지하철역부터 슈퍼마켓까지 곳곳에 꽃 파는 곳이 있는데, 장을 보면서 꽃을 사는 게 일상적인 혹은 필수적인 일이라 슈퍼마켓 출입구처럼 눈에 잘 띄는 곳에 꽃 판매대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도 흔한 풍경이다. 어느 동네를 가든 꽃집이 있어서 설마 이런 곳에 꽃집이 있을까 싶은 후미진 동네 한 구석에서도 꽃집을 만날 수 있다. 나는 휴일이면 집에서 가까운 노팅힐의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에 종종 놀러 갔는데, 과일, 야채, 도넛, 파이, 옷, 액세서리 등을 파는 숍이며 노점이 늘어서 있는 정감 넘치는 분위기가 좋아 혼자 어슬렁거리곤 했다. 꽃을 사랑하는 영국인들답게 이곳에도 역시나 꽃 가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격표가 꽂혀 있는 통에 장미부터 수국까지 갖가지 꽃들이 풍성하게 꽂혀 있고, 연인이나 가족이 꽃 구경을 하거나 사는 모습은 얼마나 평화로운지!
콜럼비아 로드 플라워 마켓(Columbia Road Flower Market)은 런던의 유명한 꽃 시장으로, 산보 삼아 꽃 구경 삼아 놀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 일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장이 서며 싼 가격에 꽃을 살 수 있는 데다 꽃도 풍부하고 다양해 영국인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빈지티 숍과 카페, 한아름 꽃을 안은 사람들, 무엇보다 넘쳐흐를 듯 풍성하게 꽂혀 있는 다양한 꽃들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답다. 장미, 튤립, 히아신스, 데이지, 아네모네, 온갖 꽃들의 향연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 --- p.27~28
해가 나면 나는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변하는 꽃의 빛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마음은 고요해진다. 그런 순간이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벚꽃 아래 이렇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라는, 일본의 하이쿠 명인 이싸의 시 부럽지 않은 시 한 수 떠오를지 모른다. 다산 정약용은 매화, 살구꽃, 국화가 필 때 벗들과 모여 시 짓기 모임을 열기도 했는데, 꽃을 보면 시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글을 잘 쓰든 못 쓰든 상관 말고 시심에 흠뻑 취해보는 것도 좋겠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가 초속 5센티미터라 했던가. 시속 100킬로미터의 속도로 질주하는 일상의 속도를 잠깐 늦추고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을 보면서 천천히 흐르는 꽃의 시간에 감응해보자. 경쟁심, 짜증,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라앉고, 마음도 천천히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 p.165
예전에 투병 중인 아내를 위해 모 회장님이 꽃 장식을 주문한 적이 있는데, 요구 조건이 인상적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한 꽃 장식을 만들어주세요.” 평범하지 않은 주문에 난감했지만,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아내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은 깊은 애정이 ‘한 번도 보지 못한’이라는 말 안에 꼭꼭 눌려 담겨 있는 듯해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꽃은 그런 존재다. 사랑이 움트는 그 시작의 순간부터 사랑이 만개하는 절정의 순간을 거쳐 묵묵히 곁을 지켜주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곁에서 때로는 풋풋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따뜻하게 사랑을 전해주는 그런 존재. 백 마디 말로도 전하지 못할 사랑이 꽃에 담겨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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