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인 끌림에
알알이 맺히곤 했던 마음 조각이
유난히도 발랄해 보이는 요즘
그대 시간에 안긴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저곳에
함께 한 시간들이 서려 있다
심장 소리에 얌전히 앉아있는 당신의 미소 한 자락이
내 조각을 울렸고
나는 혼미해진 정신을 겨우 붙잡은 채
당신의 온기로 흥건해진 나의 조각을 쓸어 담는다
---「조각놀이 _ 김희원」중에서
거센 소나기,
어머니의 울음인 줄 모르고
귀를 닫는다
거센 바람,
어머니의 교훈인 줄 모르고
창문을 닫는다
뜨거운 햇볕,
어머니의 사랑인 줄 모르고
커튼마저 닫는다
이들 없이 살아갈 수 없음을 망각한 채
난 갈수록 고립되어 간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녀와 나 사이가
창문 한 칸뿐인데
---「어머니 계신 곳 _ 김인환」중에서
바람에 노래가 있는 걸 그대는 아는가
아는 그대는 흥얼거리고 있는가
바람에 마음이 있는 걸 그대는 아는가
아는 그대는 어떤 위로를 받고 있는가
바람에 여유가 있는 걸 그대는 아는가
아는 그대는 함께 적셔지고 있는가
바람에 용기가 있는 걸 그대는 아는가
아는 그대의 머리칼은 흩날려지는가
온전히 바람에 맡겨진 순간
그대는 이전에 없던 완벽함에 감탄하고 있지 않는가
---「바람 _ 유한나」중에서
내 얘길 들어봐
어제 첫눈이 내린 거야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 위 흰 눈을 밟는데
소리가 너무 좋은 거야
뽀드득 짜악
내가 새하얀 눈 위에
첫걸음을 옮기는데
그 소리가 너무 이쁜 거야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
이 시를 쓰는 거야
너와 함께 이 눈을 밟고 싶어
이 시를 써보는 거야
---「순백 _ 김원우」중에서
지하철에 올라
덜컹 한번 덜컹 두 번
터널을 지나고 만난
도성은 회색 마천루의 숲이었다
양복을 입은 모두가 바삐 지나다녀
거리는 언제나 북적북적
고개를 끝까지 들어야 끝이 보이는 마천루 아래에서
그것보다 높은 꿈을 꾸었다
작은 우물을 나온 개구리
구한말 서양에 간 통신사
나무만 한 집을 짓겠다고
아마존 병정개미가
개미핥기에게 다짐하듯
여지껏 수많은 그대들처럼
이 도시의 당당한 일원이 되리라
---「젊은 상경 _ 이준수」중에서
“엄마는 꿈이 플로리스트였어?”
“아니, 엄마는 원래 옷을 만들고 싶었는데 잘 안됐지. 그리고 지금 직업을 갖게 된 거야.”
엄마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나는 내가 엄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명화 극장을 챙겨보고 사진을 좋아했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영화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듯했다.
“그럼 나는 왜 그렇게 영화관에 데려갔어?”
“그야 네가 너무 좋아하니까.”
그랬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내 꿈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어떡하지 엄마, 나 이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라고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엄마가 두 번째 꿈을 꾸기 시작한 것처럼 나도 새로운 꿈을 가질 수 있을까.
---「우리 각자의 영화관 _ 최정수」중에서
또래보다 일 년 늦은 대학 생활을 하게 된 나는 그 일 년을 앞당기기 위해서 좋아 보이는 활동이 있다면 있는 족족 주워 담았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내가 잘난 줄 알게 되면서도 한없이 조급해하며 다른 무언가를 찾았다. 막상 눈앞에 던져진 과제를 완벽히 해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 도망쳤고, 그 영역에서 나보다 재능을 발휘하는 다른 이들을 시기했다. 내가 빛나 보일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큰 명예를 안겨줄 것들을 찾아 헤맸다. 엔드류 카네기의 명언 ‘젊은이여, 그대 이름을 가치 있게 하라’를 실천하고는 싶었지만, 조금 쉽고 간단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내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고 싶었다.
---「걸작까지는 아닐지라도 _ 황한나」중에서
“그럼 나랑 짱친 할래?”
다시 생각해도 유치하고 어이없는 말이다. 취해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너와 주먹 하이파이브를 하고, 날이 밝아오는 5시에 이르러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점에서 내 치마에 두르라며 준 너의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헤어질 때 벗어주려 하자 너는 굳이 다음에 주라고 하고 되돌아갔다. 열 발자국만 걸어가면 기숙사였는데, 네가 가져가지 않은 외투 때문에 나는 나의 마음을 정리하는 길을 열 발자국 더 되돌아 이르러야만 했다.
---「銘明명명 - 달을 새기다 _ 최고은」중에서
꼬깃꼬깃 모아둔 티켓과 촌스러운 필터로 찍어낸 사진들을 집에 와 방 한편에 모아두고, 몸집보다 큰 배낭을 창고에 올려두고 침대에 누웠다. 샌들 자국대로 그을린 내 발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고, 미처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해가 중천에 떠야 암막 커튼에 의지해 겨우 잠이 들었다. 막연했던 그 첫 번째 꿈을 여름의 유럽으로 이뤄낸 나는, 이 이야기를 유럽의 거리에서 지독하게도 들었던 ‘VIVA 청춘’이라는 노래 안에 저장한다. 한 번 이뤄낸 꿈은 나를 끝없이 정의할 힘을 준다. 노래 속 가사처럼 ‘반짝여라 젊은 날, 반짝여라 내 청춘, VIVA!’
---「하나, 둘, 셋 그리고 꿈 _ 박병현」중에서
“넌 첫사랑이 무어라고 생각해?” 천진난만하게 질문하던 나의 얼굴을 보면서 끄응 소리를 내던 그는 살면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딱히 고민해보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 한편으로는 내뱉고 싶은 말이 나의 생각에 딱 들어맞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냥 그의 생각 자체를 알고 싶었던 것뿐인데. 눈살을 찌푸리고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어버렸고, 그는 내 웃음에 다시금 반한 것처럼 눈살을 피고 그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상황이 어색해졌는지 그는 나에게 첫사랑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은 우리가 사랑하는 동안에 수백 번, 수천 번 나에게 되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은 질문이 되었고 그때의 나는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사랑을 미워할 수 있을 때까지 _ 엄승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