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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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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년 11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384쪽 | 430g | 140*210*30mm
ISBN13 9788997875504
ISBN10 8997875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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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 반. 전화는 소리 없이 울렸다. 방해되는 게 싫어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뒀는데도 반디의 전화는 촉각을 자극해 주선의 손을 뻗게 했다. 낯선 번호에서 반디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순간엔 뜻 모를 희열에 젖었다. 떨어져 있어도 통한다는 반디 식의 텔레파시라던가, 치원이 달고 사는 운명이라는 말을 언뜻 믿었던 찰나였던 것도 같다.
「양화대교 위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다시 나가기가 힘들어. 지금 와 줄 수 있어?」
비를 맞았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 듯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고 있다. 축 늘어진 음성에 주선은 벌써 책상에서 일어섰다. 차 키가 어디 있더라……. 아니, 차가 작업실에 있던가 집에 두고 왔던가. 쏟아지는 생각을 곁에 두고 현관문에 놓인 신발을 신으려다가 주선이 우뚝 멈춰 선다.
“뭐라고?”
「치원인 수업 중이래.」
이게 진짜. 거기 먼저 전화했었다는 걸 꼭 말로 해야 하나. 눈치를 젖혀 둔 저질스러운 습성은 여전하다. 주선이 운동화 한쪽에 넣었던 발을 다시 빼낸다.
“택시 타고 와. 서울 3년 동안 암만 변했대도 니네 집 주소는 그대로야.”
「비 때문인지 빈 택시가 보이질 않아. 차가 꽉 막혀 있어서 오래 서 있을 수도 없고. 그냥 좀 와 주면 안 돼? 넌 백수잖아.」
집어 들었던 차 키를 침대에 던지고는 주선이 좁힌 미간을 두 번째 손가락으로 긁적거린다.
“백수 아니고 작가거든? 나 지금 일하고 있었거든?”
쌀쌀한 발음에 핸드폰 너머는 조용해진다. 침대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던 주선이 상체만 드러눕힌다. 자판을 두드리는 동안은 집중하느라 몰랐었는데, 창밖은 누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창가로 쏟아 붓는 것처럼 거친 빗줄기에 젖고 있다. 어쩔까. 고민하는 사이 반디의 목소리도 빗소리처럼 쏟아진다.
「엄마랑 아빠도 출장 중이어서 그래……. 생각나는 전화번호가 너랑 치원이 거뿐이야.」
그러기에 왜 그 자식한테 먼저 한 거냐고. 짜증이 불쑥 튀어 오르지만 입으로 내뱉진 않는다. 다물고 있던 주선의 입술이 떨어진다.
“이 전화번호는 뭐야.”
「양화대교 위에 커피숍이야. 있지. 세상 정말 많이 변했다. 요즘은 다리 위에도 커피를 파나 봐. 올 때 꼭 조심해서 와. 빗길이 무지막지해. 오다가 사고 난 차도 두 번이나 봤어.」
항복했다고 생각했는지 반디의 목소리는 다정해져 있다. 게다가 전엔 잘 하지도 않던 운전기사의 안위까지 걱정해 주신다. 괜한 심술이 일어 주선이 이죽거린다.
“아직 간단 말 안 했어.”
딱딱한 말에 반디는 나른히 늘이던 말을 멈췄다. 이번에 쏟아지는 건 투정이려나, 협박이려나. 집어치우라고 하면 그냥 못 이긴 척 끌려 나가 주는 체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한껏 물기 묻은 목소리가 귓가를 적신다.
「넌 왜 내 부탁 한 번을 안 들어줘?」
투정치고는 진지한 어투다. 3년의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닌가. 늘상 투정을 달고 살던 녀석도 이제 인내하는 법을 배웠나 보다. 한 번을 안 들어준 게 아니라 한 번에 안 들어준 것뿐이라고, 오해를 풀까 하다 주선이 웃음 섞인 말을 뱉는다.
“안 간단 말도 아직 안 했어.”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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