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과거 놓쳤던 부분들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도 있다.
뉴저지의 소규모 유대인 사회에 국한되었던 시선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낀 소설가 필립 로
스는 미국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역설적으로 조망했다. 그의 경우, 소설이 아메리칸 드림
의 부정적인 측면을 파헤칠 사명을 지녔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대표작 『미국의 목가』
(1997)에서 미국의 반(反)문화와 관련한 극단적 갈등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른 1970년
대, 일부 청년들이 빠져든 테러리즘의 자기 파괴적 일탈 행위를 그려냈다. 역사와 소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소설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잊혀지는 것, 고의적인 집단 기억상실에 반대하는 글쓰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기 스카르페타, 랭스대학교 교수)
“작가는 자기 사대라는 상황 속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반향을 일으킨다. 때로는 침묵도 마찬가지다. 나는 플로베르와 공쿠르가 파리코뮌 이후 탄압 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탄압을 막기 위해 단 한줄의 글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그들의 일은 아니었노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칼라스 재판이 볼테르의 일이었던가? 드레퓌스 사건이 졸라의 일이었던가? 콩고 문제가 지드의 일이었던가? 이 작가들은 각자 다른 상황 속에서, 저마다 작가로서 책임을 다했다.” (장폴 사르트르, 소설가·철학자)
“예술이란 대중 모두를 똑같이 긍정적인 감정으로 융합하는 기능을 지닌다는 이런 사고방
식은 당연히 브레히트의 연극이 전파되는 데도 걸림돌이 됐다. 사실상 브레히트는 그와는
정반대로 “예술이란 통합이 아닌, 분열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브레히트는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고, 세계 안에 도사리는 온갖 속임수를 분석음으로써, 세계의 참모습을 대중에게 있는 그대로 이해시키기를 원한 예술가였다. 물론 그렇게 하는 목적은 단 하나, 바로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였다.”
(마리노엘 리오, 연극감독·극작가)
“입센과 스트린드베리는 모두 아서 밀러, 테네시 윌리엄스, 존 오스본, 해럴드 핀터, 카릴
처칠, 사라 케인 등 영미 극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에서는 왜 스트린드베리의 역작들보다 입센의 걸작들을 선택했을까? 내면의 유령을 가시화하고 욕망의 무질서한 약동을 묘사하는 스트린드베리의 극들은 관객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반면, 입센의 극들은 안심을 준다. 주류적 기법에 속하는 양식적 코드를 통해 주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루이샤를 시르자크, 시나리오 작가)
“스탈린주의자와 유사한 마르크스주의자와 파시스트 모두를 연상시키며 시작하는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경우, 이 페스트가 “어제는 갈색이거나 붉은색일 수 있었다”고 일깨워주기 위한 구실로 쓰였다. 작품 속에서는 30년 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그 동조자들에 의해 꽃피워진 상투적 표현이 페이지를 수놓는다. 옹프레에 따르면, 카뮈는 마르크스와 레닌, 무솔리니, 히틀러가 각각 동시에 추구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믿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내세운 ‘총체적 인간’도, 나치가 말하는 ‘아리아인의 제국’도 믿지 않는 것이다.”
(장피에르 가르니에, 작가)
“톨스토이는 보통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인생 후반부에는 일부 러시아인들과 많은 유럽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정치및 영성 지도자로 활약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전환기인 1905년에 비폭력 불복종을 찬양하는 글을 집필해 또 다시 여론을 이끌었다. 그는 ‘우리가 겪는 악의 대부분은 (…) 도덕적개선에 몰두하는 대신, 정부의 압정에 순순히 따르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에블린 피에예, 작가 겸 연극배우)
“위고가 노르망디 반도 서쪽의 외진 저지섬과 건지섬의 오랜 유배 생활을 견디며 의회와 맞서고, 자신의 대표적 작품이 될 『레미제라블』속의 고달픈 민중을 발견할 수 있던 것도 이 자유 에너지 덕분이었다. 위고는 감옥과 거지, 그리고 절망에 찬 사람들을 양산하는 기득권과 중단없는 투쟁을 벌였다. 그는 『대양』에서 “난 판사를 재판한다. 난 저주를 선고한 사람들에게 형을 언도한다. 더 이상 사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난 사형장을 폐지하고, 전쟁과 투쟁하며, 죽음을 없애고, 증오를 증오한다!”라고 외쳤다.”
(질 라푸주, 작가·저널리스트)
“어쩌면 오웰은 사후 그가 노동운동의 사회주의적 가치들을 폄훼하기 위해 스탈린주의를 호명하는데 열과 성을 다한 반공주의의 사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 보다는, 오히려 ‘반(反)지식인주의적’이라는 모욕을 받는 것을 더 참기 힘들어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소설 『1984』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풍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식인들이 소비에트 정권으로부터 차용한 유토피아에 대한 풍자라는 사실을 이해할수 있기 때문이다.” (티에리 디세폴로, 아곤 출판사 창립자)
“고전주의 문학을 뿌리 깊이 탐닉했던 레닌은 혁명 후 나타난 문학과 예술 분야의 새로운 발전에 회의감을 느꼈다. 레닌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든 모더니즘에 순응할 마음이 없었다. 마야콥스키와 구성주의를 내세우는 전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 레닌의 사후에 출범한 스탈린 체제는, 모든 문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만을 창작원리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작가들의 창의성을 짓밟았다. 레닌이 바랐던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의 인류의 비약’은 소련에서는, 아니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타리크 알리, 소설가 겸 역사가)
“밖에서는 열대의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음악 소리도 그쳤다. 난초과 식물
의 강한 향기가 거실을 엄습했다. 마르케스는 갑자기 콜롬비아의 늙은 치타처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그의 모든 고독의 동반자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끝없이 쏟아지는 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조용히 물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빌라를 빠져 나왔다.”
(이냐시오 라모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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