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가 잠잠해지자 헌병들은 집집마다 뒤져 태극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흰 종이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그려넣고 네 귀퉁이에 막대 모양의 사괘를 그린 상징물에 불과했는데도 태극기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일단 태워버리고 필요할 때 다시 그려도 되는 것을 차마 없애버리지를 못했다. 다들 어떻게든 감춰놓으려고만 했다.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다. 헌병들은 군화를 신은 채 방 안에까지 들어와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옷장을 엎어놓고 천장을 뜯다 못해 아궁이와 굴뚝, 심지어 변소에 쌓아놓은 잿더미 속까지 뒤졌다. 태극기가 발견되면 주인을 잡아다 혹독한 고문을 가한 뒤 90대의 태형에 처했다. 그래도 다들 태극기를 숨겼다. 항아리에 넣어 담장 밑에 묻기도 하고, 솜옷 안섶에 넣고 단단히 꿰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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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밤이 되면 찾아갈 집도 있고, 농사지을 땅도 있었다. 아무리 부패했다 하더라도 마적이 나타나면 보호해줄 경찰과 군대도 있었다. 집도 땅도 없고, 수중의 돈도 다 떨어져가는 조선인 유랑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지였다. 화강암 계단에 걸터앉은 홍남표는 부러운 표정으로 만주인들을 바라보는 아낙네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 조상이 외침에 시달렸던 건 우리가 못나서가 아니라 비옥한 농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 만주의 여진과 거란이며 몽골족에 왜족들까지 풍요로운 조선반도를 차지하려고 쳐들어왔던 거네. 우리만큼이나 기름진 땅인 중원의 한족들이 위대한 문명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역사를 변방 야만족에게 빼앗던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이제 자기 땅에서 쫓겨난 조선인들이 이 삭막한 만주로 밀려나와 여진족에게 빌어먹는 신세가 되었군.”
--- p.134
그날이 오면 어떤 세상이 열릴까? 그날이 오면 기뻐 춤추며 웃게 될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게 될까? 기뻐서 울든, 죽은 동지들이 그리워 울든 펑펑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아니, 그날을 생각만 해도 벌써 눈물이 고였다. 그날만 오면 조선인의 고통과 슬픔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리라.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리라 기대하는 죄수처럼, 막연한 희망이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아기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향기로운 생명의 내음처럼 그녀를 설레게 했다.
--- pp.152~153
시가지를 빠져나오는 내내, 김명시는 버려둔 시신들을 생각했다. 조선이 해방되는 날,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는 날, 그들을 대신해 눈물을 흘려주리라 생각했다. 이미 시신이 되었음에도 다시 한번 일본도에 목이 잘려 장터에 전시된 뒤 기름에 불태워져 흔적도 없이 광야에 뿌려질 그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총탄은 대원들의 머리 위로, 귓전으로, 발아래 흙바닥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며 귓전을 스쳐가는 쉿쉿 소리, 흙바닥이나 담벼락에 부딪쳐 으깨지며 내는 둔탁한 소리들이 심장을 대바늘로 찌르는 듯했다. 그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 p.160
“홍 선생님, 인간이란 동물은 어찌 이리도 잔인할까요? 교전 중인 적군도 아니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민간인을 이렇게 죽이다니요. 이런 짓을 하는 인류를 구제하겠다고 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의 존재에 회의가 느껴지네요.”
홍남표는 침통하게 말했다.
“이 역시 자본주의 제국들의 침략 전쟁이 빚어낸 비극이지. 자본주의만 아니라면, 전쟁만 없다면 평범한 농민이던 그들이 왜 이런 짓을 하겠나?”
--- pp.169~170
“언니, 건강 잘 챙기세요. 여기서는 살아남는 게 투쟁이에요.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게 저놈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거예요. 저는 나가자마자 다시 항일 전선에 뛰어들 거예요. 공산주의를 하든 자본주의를 하든 그건 독립된 뒤의 머나먼 이야기죠. 언니도 부디 건강히 살아 나와서 함께해요.”
--- p.246
“아, 용맹한 여성 전사! 이름이 김명시라고 했지요? 대단한 여전사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대체 어디 군사학교를 다녔기에 그리 용감무쌍한 겁니까?”
중국 정부군 장교에게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라는 말을 하기는 어려웠다. 김명시는 곁에 서 있던 이화림의 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이화림은 김명시보다 한 살 많았으나 친구로 지내는 사이였다.
“조선 여성은 본래부터 다 용맹합니다. 여기 이화림도 있습니다!”
“아! 이화림 전사! 김명시 전사가 오기 전부터 잘 압니다, 잘 알아요! 어젯밤 고지 전투에서도 두 여성 전사가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은 과연 위대합니다!”
--- pp.260~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