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왜 우리에게 큰 기쁨의 꽃밭 길을 가게 하셨다가 결국 낭떠러지에 다다르게 하셨습니까?” 한탄해 봐도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하나의 선택만 남았다고 판단했다. “마을에서 벗어난 지역에 새 성전을 짓는 길밖에 없다”가 내 결론이었다. 이때 내 사정을 안 교회 사모인 처형(아내의 맏언니)이 권유하기를, 어떤 사람이 나와 비슷한 형편에서 조용기 목사(여의도 순복음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을 받은 적이 있으니 편지해 보라는 것이었다. 즉 교회 지을 자금을 지원받아 보아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나의 복음 전파 방침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나는 주의 일을 하면서 다른 이에게 물질적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깊이 생각지 않고 조언에 따라 편지를 썼다. 봉투에 넣기 전에 다 쓴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럴수록 왠지 모를 실망감이 찾아와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떡하지?” 방 안을 서성이며 뚜렷한 목적 없이 책장의 책들을 뒤적였다. 그때 한 책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 내륙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의 일대기였다. 그에게 나와 같은 어려움이 없었는지 궁금히 여기며 읽기 시작했다. 그가 만난 환란은 나와 비교가 안 되었다. 그의 선교는 목숨을 건 일이 수없이 많았지만, 나의 선교는 그에 비해 소꿉놀이 같았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도 수없이 겪었는데, 그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선교 초창기에 테일러 선교사는 항상 경제적 어려움이 많아 자신을 후원하는 영국 후원회(CES)에 송금 요청 편지를 자주 써 가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 나갔는데, 어느 때 CES가 빚을 져 가며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고민하며 기도하던 그는, CES에서 받아 오던 후원금을 거절하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선교하기로 결심하였다. 놀랍게도 그 시점이 선교에 성공을 거두게 되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어 나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조용하고 힘 있게 내게 다가왔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나는 당장 써 놓은 편지를 찢었고 모든 문제와 번거로움을 떠나 조용히 주님께 나아갔다. 그날 이후 나의 기도는 그전의 기도와 달라졌다. 그전엔 매달림이었고, 이젠 내 마음이 확신과 평안으로 가득 찼다. 그랬다. 하나님은 변함없으셨다. 그 옛날 ‘테일러’의 하나님이 또한 나의 하나님이셨다.
---「쓴 뒤 찢은 편지」중에서
그때(편지를 찢은 날)부터 기도하는 시간을 더 늘였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에 소망을 담고 있었다. 옛날 시골에서 장에 간 삼촌을 기다릴 때의 마음 ─ 언젠가는 삼촌이 올 것이고 분명히 달콤한 무엇인가를 사 올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 ─ 으로 기다렸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낯선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내가 편지 보낼 뻔했던, 조용기 목사가 목회하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의료 선교 팀장인 김종교 장로였고 그 내용이 이러했다. 매년 해외로 떠나는 의료 선교의 준비가 다 되었으나 가기로 한 예정지에 문제가 생겨 새 장소를 택해야 할 입장인데, 태국 항땀의 샘물 교회로 가도 되겠느냐는 문의였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확신해, 어떻게 태국에 샘물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과 내 전화번호를 알았는지를 물어보지도 않고 일정에 대해서만 물었다. 전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감사 기도를 한 뒤 급히 태국의 ‘나타칸’에게 전화를 했다. 마을의 반대에 대해(‘나타칸’도 기도하고 있었고 샘물 교회 모든 교인도 마찬가지였다.) 내 전화를 받은 ‘나타칸’도 나처럼 이번 일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고 확신했다.
---「뜻밖의 전화」중에서
계획한 것보다 식재료비가 120만 원 정도 더 많이 나왔으므로 그것은 내가 한국에 가서 부쳐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의료봉사 팀이 올 때 지원코자 가져온 헌 옷 속에서 케이스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 속에 보증서까지 있는 작은 금덩어리가 발견되었다. 나는 의료 선교 팀장인 김종교 장로에게 전화를 해 그것을 옷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김 장로는 그 일은 자신이 책임질 테니 그것을 헌금으로 여겨 사용하라고 했다. 나중에 그것을 팔았는데 식재료 추가 비용보다 10만 원 많은 130만 원이었다.
---「헌 옷 속의 작은 금덩이」중에서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찾아와, “급히 땅을 팔아야겠는데 당장 살 사람이 없는데 사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내 선교 원칙이 ‘내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이므로, 그 사람이 돈이 급해 팔려고 한 땅에 가 보게 되었다. 그 땅은 산자락에 위치하였고 2,000평 되는 땅에 굵은 나무들이 있어 필요시 목재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았고 가격(약 500만 원)도 쌌다. 무엇보다도 땅을 팔려는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니 두말 않고 구입을 결정하였다. 태국은 외국인이 토지 구입이 안 되므로 나타칸 친척 중 한 명의 이름을 빌렸다. ‘항땀’에 내 소유의 토지가 있다는 생각이 계속 나를 기쁘게 하였다. 몇 개월 후 더 기쁜 일이 생겼다. 그 땅에서 샘물이 솟는 것이었다. 전문가를 불러 수질을 조사하니 아주 깨끗한 물로 사람들이 마시기에 적합하다는 판정이 났다.
교인들의 의견을 모아, 우리는 그곳을 개발하여 마을에 물을 공급하기로 했다.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시는 물을 구입하는 입장이어서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곳 지대가 높으므로 송수 설비는 필요 없고 저수조와 송수관만 놓으면 되었다. 저수조와 물탱크와 외곽 차단 철망은 샘물 교회에서 작업하고, 마을로 가는 송수관 재료는 물이 필요한 마을 사람 개개인이 부담하고, 땅을 파서 송수관을 묻는 일을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작업하였다. 이로써 교회 이름인 ‘샘물 교회’에 걸맞게 주민들에게 샘물을 공급하는 교회가 되었다. 앞으로의 숙제는, 좀 더 큰 용량의 저수조 설비를 하여 시간제한 없이 언제든지 물을 공급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마을에 샘물을 공급하는 교회가 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