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텅 비어 적막했다. 한기가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욕조 안에는 얼음이 얇게 덮여 있었다. 여자는 벌써 푸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남자는 욕조에 누워 있는 여자가 공주 같다고 생각했다. 얼음공주.
남자가 앉아 있는 바닥은 얼음장 같았지만, 그는 냉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자는 손을 뻗어 여자를 만졌다.
여자의 손목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이미 오래전에 굳어 있었다.
여자를 향한 남자의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남자는 육체를 떠난 영혼을 어루만지듯 여자의 팔을 쓰다듬었다.
남자는 여자를 떠나면서 뒤돌아보지 않았다. ‘안녕’이 아닌, ‘다시 만날 때까지’였기에. --- p.7
“그녀가 죽었어!”
에일레르트는 짧고 약하게 헐떡이면서 숨을 쉬었다. 폐에서 거칠게 씨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에일레르트. 무슨 일인데요?”
“그녀가 저기 누워 있다고! 죽은 채로.”
그는 에리카에게 애원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커다란 담청색 집을 가리켰다.
(중략)
사실 그녀는 에일레르트의 짤막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무엇을 예상했는지 몰랐지만 피를 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화장실에는 온통 흰색 타일이 깔려 있어서, 욕조 주변에 묻어 있는 빨간색 피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에리카는 잠시 그 대비가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곧 실제로 사람이 욕조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체는 흰색과 푸른색으로 부자연스럽게 얼룩져 있었지만 에리카는 대번에 여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알렉산드라 비크네르, 결혼 전의 성은 칼그렌. 이 집을 소유한 가족의 딸이었다. 그녀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어린 시절이 전생처럼 멀게 느껴졌다. 지금 욕조 속에 누워 있는 여자는 낯선 사람 같았다. --- pp.14~5
“검시관이 할 수 있는 말은 부인이 약 일주일 전에 사망했다는 게 전붑니다. 물론 선생님이 전화하셨다는 시간을 확인해 보겠지만, 부인이 금요일 밤 9시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6시경―분명 부인이 피엘바카에 도착한 직후였을 겁니다―라르스 텔란데르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부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난로를 고쳐 달라고 했다는군요. 그는 바로 갈 수 없었지만, 그날 저녁 9시까지는 가겠다고 약속했답니다. 텔란데르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문을 두드린 시간은 정확히 9시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자, 잠시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그래서 저희는 부인이 피엘바카에 도착한 날 저녁 어느 때쯤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집 안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부인이 난로 수리공이 온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멜베리의 머리카락이 다시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번에는 왼쪽이었다. 파트리크가 보니, 에리카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황급히 손을 뻗어 멜베리의 머리카락을 바로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을 터였다.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단계를 거쳤으니까.
“따님에게 전화한 게 몇 시라고 하셨죠?” 멜베리가 비리트에게 질문했다.
“음, 잘 모르겠어요.” 비리트는 잠시 생각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7시 넘어서일 거예요. 7시 15분이나 7시 30분쯤? 누가 왔다고 해서 짧게 통화했어요.”
비리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혹시?”
멜베리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능성 있는 얘깁니다, 칼그렌 부인. 그러나 범인을 찾아내는 건 저희 일이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용의자 소거는 아주 중요한 경찰 업무 중 하나이니, 금요일 저녁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알리바이를 입증해야 하나요?” 에리카가 물었다.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허나 그날 집 안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당시 무엇을 보셨는지 전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진술서는 여기 헤드스트룀 형사에게 제출하시면 됩니다.”
모두 고개를 돌려 파트리크를 바라보자, 그가 동의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 참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특히 아이를 생각하면요.”
모든 시선이 멜베리에게 쏠렸다.
“아이라고요?”
비리트가 당혹한 표정으로 멜베리와 헨리크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네, 검시관 말로는 따님이 임신 3개월째라고 하더군요. 부군께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겠죠?”
멜베리는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으면서 헨리크에게 짓궂은 윙크를 던졌다. 파트리크는 상관의 요령 없는 행동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헨리크의 얼굴은 핏기를 잃고 서서히 창백해져서 마침내 대리석처럼 새하얘졌다. 비리트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에리카는 망연자잽했다.
“둘이 아이를 낳기로 했니?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오, 하느님.” --- pp.86~88
그녀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하다가 곧 멈춰 섰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고, 잊어버리기 전에 시험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에리카는 단호하게 걸어서 알렉스의 집으로 돌아가 발판 밑의 열쇠를 꺼낸 뒤, 신발에 묻은 눈을 털고 집으로 들어갔다.
낭만적인 저녁식사에 나타나지 않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는 뭘 할까? 당연히 그에게 전화해 볼 것이다! 에리카는 알렉스가 1950년대에 유행하던 코브라 전화에 푹 빠졌거나 구식 베이클라이트 전화기를 놔두지 않고 현대식 전화기를 사용했길 기도했다. 그녀는 운이 좋았다. 최신식 도로 전화기가 부엌 벽에 걸려 있었다. 에리카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최근 발신번호 버튼을 누르면서, 알렉스가 죽은 뒤 아무도 전화를 사용하지 않았길 바랐다.
신호음이 계속 울렸다. 일곱 번이나 울리고 나서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편에서 자동응답 안내 메시지가 켜졌다. 그녀는 메시지를 들었지만, 삐 소리가 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리카는 천천히 수화기를 돌려놓았다.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달각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갑자기 위층 침실에서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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