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력하여 보도한 탈리도마이드 재앙 취재는 어두운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과 가족이 캠프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아이들이 장애를 떨쳐 버리고 씩씩하게 성장해 가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그리고 사회적인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잘 교육하려는 어머니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문제를 호소하는 아버지들의 적극적인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p.72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담당한 여성들과의 추억은 끝이 없다. 작은 몸으로 여성운동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범 구원 활동에 침식을 잊고 뛰어다녔던 이우정 씨는 그 후 국회의원이 되어 남북통일 문제에도 심혈을 기울였지만, 얼마 전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암담할 뿐이다. 노동자로 공장에 들어가 여성들을 훌륭히 조직하여 과감한 투쟁을 한 조화순 목사의 담력에도 감탄했다. 어느 날 그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을 때, 통역이 사정이 생겨 먼저 돌아가고,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나와, 영어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그녀가 손짓 발짓만으로 대화하며 웃고 또 웃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면서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p.120
드디어 다음 날 아침, ‘법정’이 열렸다. 처음에 일본의 나, 한국의 윤정옥 선생님, 필리핀의 인다이 사홀, 세 명의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가 개정 연설을 했다. 너무나 바빠서 나는 문장을 충분히 손질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바쁜 상황 속에서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 내가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8개국에서 64명이나 되는 피해자여성들이 고령이고 육체적으로도 쇠약한 몸으로 먼 일본까지 와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더구나 이 ‘법정’은 피해자가 주인공 아닌가. 사흘간에 걸친 심리는 두 명의 수석 검사인 패트리샤 비자 세라즈와 우스티나 돌고폴의 공동 기소장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각국 검사단이 자국의 원고와 그 소속 부대, 상관, 지휘관까지 위로 거슬러 올라가 여러 명을 기소하였다. 수석 검사 두 명이 그들 중에서 쇼와(昭和) 천황을 비롯하여 10명의 일본군, 정부의 최고 책임자들을 골라서 피고로서 기소하고, 동시에 국가 책임도 추급했다. 그러면서 “일본군 성노예제 ‘위안부’ 문제를 인도주의에 대한 죄로서 심판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국가책임도 전쟁 중의 국제법 위반 행위만이 아니라 어떤 보상이나 처벌도 하지 않았던 전후 책임까지 명확히 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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