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오역은 개별적인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를 모른다기보다는, 어떤 한 단어의 미세하거나 깊은 감각을 간과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영어 단어 하나에 대해서 우리말 뜻을 하나만 알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경제적인 방법으로 공부를 했다고 스스로 믿기가 쉽지만, 그것은 참으로 미련한 판단이다. 이런 성향을 보이는 번역자들은, 단순히 사전을 찾아보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잘 알지 못하는 단어를 대충 짐작으로 꿰어 맞춰서 슬그머니 넘어가려고 하지만, 남들이 보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는 나의 사소한 결점이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눈속임은 요령이 아니라 태만이다.--- p.5 「머리말」
best
“What’s your best time of reloading depth charge?”
X 폭뢰를 발사한 다음 다시 탑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 「상과 하」에서 구축함의 함장 로버트 밋첨이 다른 장교에게 묻는 말이다. your best time은 (새벽 3시냐, 정오냐, 아니면 오후 2시 14분이냐 하는 식으로) 〈가장 좋은 시간〉이 아니라, 〈제군들이 세운 기록〉, 즉 폭뢰를 한 발 쏜 다음 다시 발사 준비를 완료하는 데 걸린 가장 짧은 시간의 〈기록〉을 의미한다. 임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질문이다.
○ 「제군들이 폭뢰를 재장전하는 데 걸린 최단 시간은?」--- p.67
butterfingers
“Our lives are in your hands and you have butterfingers?”
X 우리 목숨이 자네 손에 달렸는데 과자나 먹게 생겼어?
☞ 「쥬라기 공원」에서 공룡 표본을 훔쳐 팔아먹으려고 보안 장치를 일부러 고장 낸 컴퓨터 전문가에게 리처드 아텐보로가 화를 낸다. 어쩌다 이런 황당무계한 번역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귀찮아서 사전을 찾아보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butterfingers는 과자가 아니라 (마치 손가락에 미끈거리는 버터가 잔뜩 묻은 듯) 걸핏하면 물건을 떨어트리거나 더듬거리는 사람, 또는 그런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를 뜻한다. in your hands의 hand와 butterfingers의 finger가 절묘한 관계를 이루는 말장난이다.
○ 「우리 목숨이 자네 손에 달렸는데, 이렇게밖에 못하겠나?」--- p.96
coke
“They found coke on one of them?”
X 콜라를 발견해서 어떻게 됐죠?
☞ 「뮤직 박스」에서 변호사 제시카 랭이 동료에게 의뢰인들에 대해서 묻는 말이다. 의뢰인이 〈콜라〉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해서 왜 경찰이 수갑을 채우고 체포까지 해야 하는지를 이상하게 생각했다면, 역자는 coke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사전을 뒤져 봤어야 하고, 그랬다면 coke가 속어로 마약 cocaine(코카인)이라는 사실을 당장 알게 되었으리라.
○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코카인을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되었다는 말인가요?」000 p.160
rude
“Oh, it’s rude not to here.”
X 이곳에선 통하는 편이죠.
☞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로버트 레드포드의 상아를 실어 주려고 벌판에서 기차가 멈추자, 놀란 메릴 스트립이 〈당신 때문에 기차가 멈추다니, 당신 유명한 분인가 봐요〉라고 묻는다. 예문은 레드포드의 태연한 대답이다. 원문에서 레드포드는 번역문에서처럼 잘난 체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가 한 말에서 not to 다음에는 stop the train이 생략되었다. 그러니까 기차가 멈춘 까닭은 레드포드가 유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외딴 곳에서는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기차가 서지 않으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고, rude(예의에 어긋난)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 「아, 여기선 그러지 않았다가는 욕을 먹죠.」--- p.616
son
“I’m your son.”
X 난 어머니의 아들이잖아요.
☞ 「삼손과 들릴라」에서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느냐〉고 꾸짖는 어머니에게 빅터 머튜어가 이죽거린다. 얼핏 보기에는 완전한 번역 같지만, 영어 단어와 같은 뜻의 우리말 단어를 하나씩 바꿔 놓기만 한 듯싶은 인상을 준다. 그것은 〈우리말〉이 아니라 한글로 적어 놓은 영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진짜로 무슨 말을 할까? 단어를 단어로 바꿔 놓지만 말고, 의미까지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다.
○ 「어머니를 닮아서 그래요.」
「인생 2장」에서 제임스 칸에게 걸려 온 어머니의 전화를 대신 받은 동생의 대답이다.
「It’s Leo, your son’s brother.」
X 「둘째 아들 레오예요.」
Leonard(레너드)의 애칭인 Leo는 〈리오〉라고 발음한다. 비록 리오가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여기에서처럼 (차별에 대한 불만을 나타내느라고) 비아냥거리는 뒷맛이 담긴 완곡한 표현은 번역이 쉽지가 않다. 예문을 풀어 보면 이런 내용이다. 〈어머니는 형만 아들이라고 생각해서 저는 아들 취급도 안 하시니까 말씀인데, 제가 누구인가 하면 어머님이 소중히 여기는 아드님의 동생쯤 된답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이런 식으로 직역을 하는 편이 낫겠다.
○ 「전 아드님의 동생인 리오인데요.」
--- p.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