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적 복음의 의미에 따르면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복음적’이지 않으며 그 대신 구원적이다. 우리가 복음적이라기보다는 구원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렇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이라는 말과 구원이라는 말을 (잘못) 동일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 ‘구원주의자들’이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볼 때 본능적으로 (개인적인) ‘구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 책은 그 차이를 보여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원의 문화’를 만든 후 그것을 ‘복음의 문화’로 착각해왔다. -2장 “복음의 문화인가? 구원의 문화인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단지 성금요일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와 구원 계획에서 십자가가 아무리 핵심적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가 십자가 이야기 그 이상임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저 죽기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 이야기에는 예수님의 삶(탄생, 가르침, 행동)도 포함된다. -4장 “바울의 사도적 복음” 중에서
복음의 핵심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상 유일한 관념은, 복음서들이 예수님에 대한 책이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 이야기가 복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복음으로서 들려준 것이다. 바울이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보았듯이, 사복음서 역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들은 정말로 복음 그 자체다.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가운데까지 이 책은 모두 예수님에 관한 책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존 목사는 이 점을 이렇게 잘 설명한다. “모든 성경 말씀이 복음을 가리키지만 오직 복음서만이 복음을 온전히 서술하고 있다. 복음서와 복음은 하나다.” -6장 “복음서 안의 복음?” 중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셨을까? 그렇다. 그분은 복음을 선포하셨다. 복음은 이스라엘 이야기를 성취하는 예수님 이야기이며,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에 서 있다고 보셨다. 나는 예수님이 “자신이 선포한 복된 소식의 일부일 뿐 아니라 그 당시 일어나고 있던 일의 핵심 요소였다”라고 말한 나의 친구이자 동료인 클라인 스노드그래스의 말에 동의한다. -7장 “예수와 복음” 중에서
또한 베드로의 복음전도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난 뼈대 위에 살아 있는 몸의 생기를 더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복음은 그분의 삶과 죽음, 부활, 승천, 성령이라는 선물, 그분의 재림,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역사의 종말을 포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이야기다.
-8장 “베드로의 복음” 중에서
예수님이 참 왕, 참 메시아, 참 이콘, 참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임무를 예수님의 백성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불완전한 이콘으로서 불완전한 방식으로 불완전한 세상을 다스린다. 그러나 언젠가 완벽한 이콘이 다시 오실 것이며, 그분의 이콘들을 구원하시고 다시 한 번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수님이 성전이 되실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온전할 것이다. 동산은 영원한 도성이 될 것이며, 평화와 사랑, 기쁨, 거룩으로 가득할 것이다. 모든 찬탈자들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신해 다스릴 것이다.
영원히.
--10장 “복음의 문화 만들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