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을 “석존부출(釋尊復出, 붓다가 다시 출현했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민지(閔漬)의 「지요서(旨要序)」다. 내용은 지공이 고려로 오자, 개경의 사녀(士女)들이 “석존이 다시 출세하여 먼 곳에서 이곳에 도착하셨으니, 어찌 가서 친견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개경의 감로사(甘露寺) 앞 도로가 저자거리처럼 가득하기가, 금강산으로 떠나는 2주간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이다.12 그런데 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을 보면, 태정제 3년(1326) 3월로, 이때는 지공이 어향사의 임무를 띠고 고려로 온 직후다. 즉 지공에 의한 계(戒)나 선(禪)의 교화와 같은, 인물적인 측면이 드러날 시간적인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혈통적인 신성성에 의한 판단이 작용했을 개연성을 환기시킨다. --- p.34
현대의 불교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공은 인도불교가 사라진 모종의 잔존 양태 속에서 출가한 기록이 전해지는 인도불교의 최후를 경험한 인물이다. 이 경험과 불교 수학을 바탕으로 결국 티베트를 거쳐 동아시아에 정착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아시아 불교 방식에 자신의 경험과 불교 수학을 견주어 설명하는 것은 비단 악의적인 과장과 비약이라고 비판할 수만은 없다. 즉 지공이 처한 특수한 환경과 변화에 대한 이해를 반영해서, 그의 행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 p.111
지공은 고려의 언어와 문자에 능하지 못했고, 고려에서 2년 7개월을 머물다 대도로 돌아간 인물이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지공의 영향은 선이라는 내용적인 부분보다도 수계와 수계작법이라는 종교의식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종교의식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부분이며, 여기에서 중요한 핵심은 다름 아닌 종교적인 감동이다. 지공은 이 부분에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이 단기간에 고려의 풍속마저도 바꿀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하겠다. --- p.129
지공의 계율인식은 그의 장거리 유력을 통해서, 결국 고려불교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지공이 원나라로 돌아간 이후에도, 지공의 영향은 고려 선승들의 지공문하 유학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더욱 그렇다. 지공의 대승불교적인 계율 인식은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차단하고, 한국불교의 특징을 환기시킨다. 이런 점에서 지공은 한국사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확보한다고 하겠다. --- p.138
나옹은 지공의 치명(治命)을 받은 수제자로, 고려에서 지공의 막대한 영향력을 계승하는 대표자의 위치를 확보한다. 이는 고려불교에서, 나옹이 일약 불교계의 실질적인 1인자가 될 수 있는 한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나옹이 고려불교 안에서 확고한 위상을 확립하는 부분에, 생불(生佛)로까지 평가되는 지공의 후광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나옹의 고려불교 위상확보와 관련된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측면이다. 바로 이와 같은 부분이 ‘지공 → 나옹 → 자초’로 계승되는 여말선초 최고의 법계(法系)다. --- p.167
당시의 불교는 오랜 타성과 라마불교의 영향에 의한 세속화에 봉착해 있었다. 그러므로 불교의 윤리인식은 시대적인 요청 덕목이었다. 나옹은 이익중생과 윤리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가사문학과 정토를 통한 실천적 민중구제를 추구한다. 이는 결국 열반 후 전국적인 추모열기 속에서 붓다의 화신으로까지 부활하는 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p. 214
공부선은 신돈과 거리를 두게 된 공민왕의 불교개편 의지에 따른 것으로, 나옹은 이와 같은 공민왕의 개편구조 속에서 주맹으로 발탁되면서 일약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나옹에게는 시제의 제시와 판단까지 공부선과 관련된 전권이 부여되었는데, 여기에서 나옹이 제시한 것은 ‘삼구 → 공부십절목 → 삼관’이라는 선적인 방법이다. 이는 공부선이라는 선종을 중심으로 한 제종파의 통합적인 측면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p.241
나옹문도의 나옹에 대한 붓다화는, 정국의 재변화에 따른 전국적인 추모물결과 더불어 점차 일반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이 여말선초의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면서 조선조에 이르러 석존화신으로까지 완성되는 것이다. 특히 나옹은 경전의 권위와 공부선회라는 회상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를 넘어서 동아시아 불교사에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최고의 붓다화를 이룩하게 된다. 이는 다시금 스승인 지공, 제자인 자초와 더불어 증명삼화상이라는 초월적인 인식을 초래하며, 오늘날까지 한국불교를 유전하고 있다.
--- p.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