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요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상대를 안심시키는 것,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걷고, 운전할 때는 노란불에 멈춰 서고, 오가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가 하품이 날 만큼 지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상대가 잠잠해지면 그때 슬그머니 빠져나가 007 임무를 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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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는 점증적인 심리 게임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건 최근의 공격이 아니다. 다음 차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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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 카에다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9·11 이후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제트여객기가 초고층 빌딩을 뚫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 끔찍한 그림이 대체 무엇일까? 아주 평범했던 화요일 아침에 3천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보다 더 파괴적인 행위가 말이다. 이보다 더한 수위로 실행할 수 있는 공격은 하나뿐이다. 바로 버섯 모양의 구름, 어마어마하게 눈부신 핵폭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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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내 안에서 온갖 비참한 장면들이 거품처럼 부풀어 올랐다. 내장이 튀어나온 사람들. 소름끼치는, 너무나도 무의미한 희생. 당장 저 남자ㅔ게 달려들어 마구 밀어붙이고 흔들어대며 이렇게 따져 묻고 싶다. 어떻게 옷에 꽃을 꿰매어 단 여자를 죽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50만 명이나 죽이려 할 수 있는지. 아마도 저 남자는 평범한 미행꾼에 불과하다. 내일, 기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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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진은 화장실 변기의 물탱크에 메모를 남기라고 했다. 나는 종이 타월을 몇 장 뽑아서 몇 줄 끼적였다. 혹시라도 중간에 가로채일 경우를 대비해 신분이 드러날 만한 정보는 적지 않았다. 그냥 우리는 잘 있으며, 배관에 문제가 없는지 알고 싶으니 답장을 보내라고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도자기로 된 물탱크 뚜껑을 들어 올리자, 이미 테이프로 붙여놓은 종이가 보였고, 겉면에 아마릴리스 꽃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종이를 펴서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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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행을 활용할 기회는 남아 있어. ASSK가 널 보고 싶어 해. 15일 새벽에 차량을 보내줄게.’ ASSK는 아웅 산 수 치의 줄임말이고, 15일까지는 앞으로 엿새나 기다려야 했다. 나는 쪽지를 접어서, 내가 감자튀김을 주문하는 동안 대릴이 읽어볼 수 있도록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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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는 시간과 재능이 필요한 단계다. 몇 주, 몇 개월, 몇 년에 걸쳐 관계를 맺어가야 한다.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 신뢰를 쌓는다. 그러다가 서서히 ‘워싱턴에 특별한 연줄’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흘리면서 간을 본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한 방으로 포섭한다. (...) 본인과 가족의 목숨을 서로 지켜주면서 세상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보자고 믿음의 도약을 하는 것. 이런 관계들이 몇십 년씩 지속되며 전쟁을 종식시키고 다양한 위협을 막아왔다. 역사를 바꾸어왔다.
--- p.180
새로운 위장 신분이 견고해질수록, 현실은 거기에 가려졌고 점점 더 멀어져갔다. 나는 이 신분으로 첫 번째 여행을 다녀오고, 두 번째 여행까지 무사히 마쳤다. 처음에는 착륙 후에 세관에서 심문받을 게 두려워 비행 중에 세부 정보를 강박적으로 암기했다. 하지만 새 신발에 길이 드는 것처럼, 얼마 안 가 자연스러워졌다. 현실 세계는 내게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앤서니와의 결혼은 무효화되었고, 관련 서류는 뜯지도 않은 채 부엌 식탁에 방치되었다.
--- p.200
“천식이에요?” 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기가 있어요. 우린 중국에 살죠.” 내가 말했다. 그의 자세가 달라졌다. 그리고 부모 대 부모로서 공감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맑은 공기를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을 한탄하는 눈빛도 들어 있었다. “우리 딸도 가끔 호흡이 가빠질 때가 있어요. 혹시 정향유를 써본 적 있어요?” 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 p.344
나는 먼지 많은 방에서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쌕쌕대던 아기를 떠올렸다. 환경오염과 공습, 드론으로부터 딸을 보호하기 위해 어려운 선택을 내린 아버지를 생각했다. 우리는 어쩜 모두가 자신만이 정의롭다고 생각할까 싶었다.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려면 실은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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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한 차 안에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뺨을 만져보았다. 10년 가까이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내 진짜 얼굴은 반창고 밑으로 새로 난 축축하고 창백한 피부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다리 끝의 신호가 초록빛으로 바뀌자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변속을 하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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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나는 대답했다. 그대로 숨지 않고 카메라 앞에 앉아 세상의 진실에 대해 말했다. 감격스러웠다. 나는 평생 사회적 기대나 전쟁 게임과 전략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여과 없이 의견을 개진하자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이 몰려왔다. 나의 인터뷰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 p.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