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한참 후 태어난 대한민국 젊은이입니다. 전쟁에 대해 관심도 없었으며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몇 년 전 튀르키예로 여행 갔다가 거리에서 우연히 참전 용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6·25전쟁 때의 공로를 기리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계셨어요. 저에게 그 훈장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셨고 낯선 외국인인 저를 친구처럼 아주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정작 잊지 않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저인데 튀르키예의 참전 용사는 한국인인 저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주셨고 저와의 만남을 무척 반가워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참전 용사들이, 우리가 고통당할 때 먼길 달려와 도와주었고 여전히 한국을 기억하고 있는 진정한 ‘한국의 친구’임을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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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월에는 각뉴부대 병사가 한국인 노무자를 돕다가 함께 희생된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인 노무자들이 각뉴부대에서 통신 전선을 복구하고 있었는데 적진에서 박격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한 거죠. 미처 피하지 못한 한국인 노무자 두 명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이를 본 각뉴부대 멜레세 베르하누 일병이 노무자들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그가 노무자 한 명을 부축하고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의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졌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고 숨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함께 묻혔습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운 상징이 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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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공군을 보내온 나라는 몇 있었어요. 하지만 전투 비행대를 보내온 나라는 미국과 호주, 남아공뿐이었습니다. 전투는 땅 위에서만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해군이라고 바다에서만 싸우고 공군이라고 공중에서만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공군도 해군도 육지에서의 전투를 지원합니다. 특히 공군의 지원은 육군이나 해군에게 엄청난 힘이 되지요. 남아공의 전사자 중에는 특히 소위, 중위 등 장교가 많습니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주로 전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희생은 6·25전쟁에서 총 1만 2,400여 회 출격하여 엄청난 전과를 올린 기록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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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에 실시된 서해 백령도 지원 작전 때는 도로 대신 해변을 활주로로 이용해야 했습니다. 썰물 때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해변의 고운 모래가 엉겨 단단해지면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연 활주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참 아름답고 낭만적인 장면 같지만 그리스 수송대에는 그런 한가한 상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바로 건너편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긴장이 감돌고 있었으며 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어요. 또 백령도는 적이 차지한 땅과 너무 가까워 전투기의 호위를 받지 않고는 수송기가 비행하거나 활주로에서 이착륙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썰물 때만 활주로가 만들어지니 착륙하여 머무를 시간도 짧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제한되니 어려움이 많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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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몽클라르 장군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병을 모집하였습니다. 그 결과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1,300여 명에 달하는 지원병이 선발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몽클라르 장군은 직접 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할 생각이었지만 막스 르젠 국방차관이 반대했습니다.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중장인 당신이 어떻게 대대장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지요. 몽클라르 장군은 스스로 장군직을 버리고 중령 계급장을 달겠다고 말했습니다. 몽클라르 장군의 군 경력은 당시 미8군 사령관 리지웨이 중장과도 비슷했습니다. 또 자기보다 젊은 상관의 지휘를 받아야 했지만 상관없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서의 그의 계급은 중령이었지만 사람들은 몽클라르 대대장에게 장군 예우를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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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국에서 여러 가지 사회 사업을 펼쳤습니다. 한센병 환자 전용 병원인 다미엥 병원을 세웠고 환자 자녀들을 위한 직업 학교도 만들었습니다. 1965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소록도 병원에서 벨기에 의료진이 진료 활동을 했는데 그때 온 간호사 중 한 명은 김화 지구에서 전사한 피에르 가일리 대위의 동생이었습니다. 3남매가 아시아 끝의 작은 나라에 와서 헌신하고 희생한 것이에요.
벨기에에는 6·25전쟁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참전 부대인 제3공수대대 안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부대의 건물들에는 ‘임진강’ ‘학당리’ ‘잣골’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또 이 대대를 가일리 대위의 이름을 따서 ‘가일리 대대’라고 부른다고 해요. 참전 용사 3,171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박물관 입구에는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출구에는 ‘더는 잊지 않는다(Forgotten no more)’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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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한국에서는 아군이 여전히 공산군에게 밀리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유엔 사무총장은 지상군을 보내달라고 네덜란드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일주일 후 네덜란드 정부는 군사적인 사정으로 파병할 수 없다고 답장을 보냈어요. 하지만 많은 네덜란드 국민이 한국에 군대를 보내 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민간 기구인 ‘한국참전지원병임시위원회’를 만들고 참전을 자원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국민 여론에 따라 결국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지요. 네덜란드 국민은 멀리 떨어진, 이름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한국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 정부를 움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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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여단장 브로디 준장은 설마리에 갇힌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보았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여단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어요. 브로디 준장은 철수에 앞서 글로스터 대대장 카니 중령에게 다음과 같은 무전을 보냈습니다. “최대한 노력하여 적의 포위를 뚫고 여단에 합류하라.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여 저항해도 소용없다고 판단되면 적에게 투항하라. 이 둘 중의 결정권을 귀관에게 주겠다. 글로스터 용사들의 행운과 성공을 빈다.”
25일 아침 제29여단의 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철수도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추격해오는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푸질리에 대대장 포스터 중령이 전사하였습니다. 한편 글로스터 대대는 무전기가 방전되어 철수 명령을 즉각 전달받을 수 없었습니다. 25일 늦은 밤까지 전투를 계속했던 대대는 26일 아침이 되어서야 철수 명령을 전달받았어요. 대대장 카니 중령은 중대장들을 불러모았습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각 중대장이 알아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아군 진지로 가도록 명령했습니다. 건강한 병사들은 중대장들을 따르기로 했고 부상병은 그 자리에 남았지요. 그들을 돕기 위해 군목 데이비스 목사, 군의관 힉키 대위 등 의무요원이 235고지에 남았는데 그들은 모두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 p.123
개천에 도착한 튀르키예군은 전열을 정비하며 새롭게 방어선을 만들었습니다. 튀르키예 여단이 와원리, 신림리, 개천 전투에서 사흘 동안 버텨준 덕택에 중공군의 군우리 진출은 닷새나 지체되었고 미 제8군은 철수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1월 26일부터 2월 6일까지 튀르키예 여단은 병력 15%, 무기 및 차량 70%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적군도 5,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타임〉 지에는 “한국전쟁에서 뜻밖에 놀라운 것은 중공군이 아니라 튀르키예군이었다. 튀르키예군이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을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는 것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 p.143
태국은 규모는 작지만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했고 의료지원단까지 파견했습니다. 참전 16개국 중 이렇게 3군을 모두 보낸 나라는 미국과 호주와 캐나다, 태국 네 나라뿐입니다. 태국 정부는 지상군 1개 여단 병력과 해·공군 병력까지 파병할 것을 고려하여 부대 이름을 ‘파한(派韓) 타이왕국 원정군’이라 정했습니다. 총사령관에는 황태자 피스트 디스퐁사-디스쿨 소장을 임명했지요. 왕족이 직접 전쟁터로 나서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 당시 태국 국내외 사정을 감안하여 지상군 파병 규모를 1개 대대로 축소 조정하였습니다. 유난히 추웠던 1950년 겨울 한국에 도착하여 곧 바로 참전하였던 태국군은 미군과 영국군에 배속되어 수많은 전투와 작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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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8일 유엔이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를 결의했을 때 호주는 곧바로 지지를 보냈습니다. 호주의 멘지 총리는 “우리가 만일 유엔 안보리의 결정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위선자가 아니면 비겁자가 되어야 하는, 역사상 전례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라고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상하 양원으로 이루어진 호주 연방 의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정부의 해·공군 참전안을 승인하였지요. 규모는 1개 여단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장병 중에서 지원자를 받기로 했습니다.
멘지 총리는 다시 “지금 우리에게 시간 소요가 가장 중요하다. 대규모 부대보다 소규모일망정 조속한 참전이 몇 배 더 바람직할 것이다”라고 하며 해군과 공군을 서둘러 보낸 후 곧 지상군도 파견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당시 한국에서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한국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8월 8일 호주에서는 지상군 모집이 시작되었어요. 지상군은 900명 정도의 1개 보병 대대 규모로 편성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때 참전을 지원한 장병은 호주 정규군 총수의 98%에 달했습니다.
--- p.193
리처드 위트컴 장군은 6·25전쟁 때 미군 군수 사령관이었습니다. 전쟁 막바지이던 1953년 초, 부산에 큰불이 나자 장군은 군용 담요, 옷, 소시지, 밀가루 등 군수 물자를 부산 시민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군수 물자를 민간인에게 나눠주는 것은 불법이고 군사재판에 회부될 일이었습니다. 위트컴 장군은 미 의회 청문회장에 불려갔지요. 미국의 여야 의원들은 “어떻게 전쟁 중에 군수 물자를 민간인에게 나눠줄 수 있느냐”라며 일제히 장군을 비난했습니다. 이때 위트컴 장군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총과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장군의 말에 감동한 모든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래도록 박수를 쳤습니다. 덕분에 장군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그는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버려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부하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위트컴 장군은 전쟁 고아들을 보살피고 있던 한묘숙 씨와 결혼하여 북한에 남겨진 미군 유해 찾는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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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기념공원에는 도은트 수로라는 물길이 있는데 ‘도은트’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최연소 참전 용사의 이름입니다. 호주에서 와 17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소년을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지요. 도은트 수로는 삶(녹지)과 죽음(묘역) 사이의 경계를 흐르고 있습니다. 도은트 수로 앞쪽으로는 무명 용사의 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해마다 11월 11일 오전 11시가 되면 전 세계가 부산을 향해 1분간 묵념을 합니다. 이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6·25전쟁 유엔군 전사자들을 위해 묵념하는 ‘턴 투워드 부산’ 행사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아직도 6·25전쟁과 참전 용사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확실한 표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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