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순서가 되자 의사 선생님은 청진기를 가슴과 배 부분에 대 보며 말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멈추세요.”
숨 쉴 기운도 없었던 어머니는 죽을힘을 다해 의사 선생님의 지시대로 했다. 의사 선생님이 이번에는 등 쪽으로 청진기를 옮겨서 대략 여섯 번 정도 더 진료를 하고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큰 도시의 큰 병원에 가 보세요. 여기서는 자세하게 검사할 의료 장비가 없어 확실한 병명을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서 원기를 돋우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링거액을 어머니 팔에 꽂아 줬다. 큰 병원으로 가라는 말에 기분이 찝찝했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약 기운이 혈관으로 퍼지기도 전에 어머니는 잠이 들었다. 밥도 못 먹고, 의원까지 오느라 차에 시달리고, 또 그전까지 마늘 논에서 노동했던 피곤함으로 인해 잠을 청했던 것 같다. 잠들어 있는 모습이 천진난만하여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팔에 연결된 링거액 줄만 없으면 환자 티가 전혀 나지 않는 어머니였다. 온종일 들판에서 일한 탓에 그을린 검은 얼굴이 약간 붉게 변하면서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주사를 맞는 동안 아버지도 침대 옆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본인도 긴장감이 풀어져 한참을 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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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야? 나 좀 보자.”
그리고는 묵묵하게 방으로 들어가서 이부자리를 밀고 앉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오니 덩달아 할머니도 일어나 같이 앉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낮은 음성의 중압감을 느꼈는지 호롱불도 세 사람의 눈동자를 충실히 밝히고 있었다. 먼저 할아버지가 입을 뗐다.
“아비야. 왜! 어미가 차도가 없느냐?”
아버지가 흠칫 놀라면서 대답했다.
“예. 큰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약만 먹으면 호전될 것이라고 했거든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대답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또 따지며 물었다.
“그러함에도 너는 왜, 담배를 자주 피우노?”
아버지는 점점 대답이 궁색해서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마냥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아버지의 추궁은 계속되었다.
“아비야. 숨기지 말고 모두 말을 해라. 그래야 힘을 합쳐 대책을 강구할 것 아이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할아버지는 계속 이야기했다.
“어미의 병색은 더 짙어지고, 너는 더 고민을 하는 것 같고...?”
묵묵부답이던 아버지의 입술을 향하여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어깨가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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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집안에 득실거려야 혹 우환이 생겨도 다른 아들이 대신 제사를 지내는 등 죽은 아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가 혹, 급성 간암을 피해 건강만 했다면 자식의 수를 여덟, 아홉을 넘어 휠씬 많이 낳았을 것이며 그때마다 할머니는 본인의 확고한 의지가 딱 맞게 떨어진다고 좋아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큰아들, 곧 나의 큰아버지는 1927년 정묘년(丁卯年), 토끼띠 해에 가도실에서 태어났다. 그해 조선 경성에서는 한국방송공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경성 방송국 라디오방송이 개국했다. 또 12월에는 경성부, 지금의 서울특별시 기온이 영하 23.1℃까지 내려가면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공식 최저 기온을 기록했다. 큰아버지와 같은 해 출생한 사람은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인 김영삼, 포스코 명예회장 박태준, 방송인 송해, 가수 백설희, 작곡가 길옥윤 씨 등이 있다.
1927년 1월 12일 의성 지역의 명승고적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존재하였던 국가 조문국에 대하여 소개했다. 그 기사는 ‘의성읍에서 남으로 향하다 금성면 소재지에 채 못 미쳐 만나는 언덕받이 오른편이 금성면 대리리 산 384번지이다. 이곳에 있는 잊힌 소왕국 옛 조문국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통적 고분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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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자신의 팔자는 스스로 개척하리라 다짐을 했다. 옛말에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했는데 새어머니는 그 말을 뒤집으려 각오했다. 뒤웅박이란, 박을 쪼개지 않은 채로 꼭지 근처에 구멍만 뚫거나 꼭지 부분을 베어 내고 속을 파낸 바가지를 말하는데, 이 뒤웅박에 부잣집에서는 금은보화를 담고 가난한 집에서는 여물을 담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는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느냐, 아니면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가느냐에 따라 그 여자의 팔자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새어머니는 두 번째 시집에서 보란 듯이 살아 좋은 팔자를 만들 것이라 다짐했다. 눈을 떴으니 허리를 세우고 주섬주섬 옷을 입을 때쯤 옆자리에 누워 있던 할머니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해 뜰 참까지 더 자거라! 이 집에서 하루 이틀 살 것이 아니잖은가? 오늘 아침밥까지는 내가 할 터이니 그리 알게!”
할 수 없이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 밥상은 어제저녁 밥상과 같은 모습으로 차려졌다. 할아버지는 또 ‘에헴’ 하며 안방으로 들어와 앉았고 새어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모깃소리로 잘 주무셨냐고 인사했다. 우리 7남매도 새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인사한 뒤를 이어 우물쭈물하다가 저마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엄마, 잘 주무셨니껴?’라고 아침 인사를 했다. 새어머니와 관련된 것에 익숙하지 않아 참 어색했다. 죽은 어머니와 그랬던 것처럼 편안함이 곧 오겠지라고 담담하게 생각하며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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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아 준 어머니가 좋은 유전 인자를 주셨던 것 같아요.”
“당연하지. 그리고 새어머니도 천상천하의 선녀가 우리 집으로 오셨고...”
“그럼요. 저도 자식을 키우면서 나의 핏줄도 어떨 때는 미워서 속이 펄펄 끓을 때도 있더라고요.”
“너만 그랬겠니! 그럴 때마다 새어머니를 떠올리며 늘 감사했다. 자식들이 건사하는 데도 새어머니의 손이 필요했지만 그때 아버지 나이가 서른 살쯤이었으니 그 젊음의 열기에 아내가 없었으니...! 되돌아보면 참 암담했지? 제수는 고향 가도실에 살면서 가장 후회한 시간이 언제였죠?”
제수는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을 아꼈다. 추측하건데 뭐, 잘 알고 있으면서 물어보느냐라는 뜻이 내포된 듯했다. 나로 인하여 동생 부부가 선택의 여지 없이 고향 가도실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하였고 층층시하(層層侍下)의 어른들을 보살펴야 되는 장남의 역할을 대신해서 쭉 이어왔다. 결국은 그 어른들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3년 탈상을 한 후 그 혼령까지도 서운하지 않게 마무리하고 이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 동생의 가정에서 최고의 존위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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