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쉽고 간단해야 진리입니다. 진리는 물과 같아서 즉석에서 보고 들으며 얻어먹고 마실 수가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어디에 소속되어야 하고 어디에 다녀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생각과 습관에서 오는 구속으로부터 원래 자유였었고 지금도 자유인(自由人)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장 진리를 종교로부터 해방시켜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종교가 참 종교요, 살아 있는 종교입니다.
--- pp.86∼87
지금의 종교는 현재의 우리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부정하고 원죄와 무명이라는 관념의 유희 속에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치부하고, 현재를 담보로 한 미래의 그 어떤 상황을 설정한 후 그 시점에 가서야 구원, 해탈을 할 수 있다고 진리를 호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기존의 고정관념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虛構) 속의 고뇌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 pp 61
불교에서는 이 현상계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보면 중생의 업(業) 때문에 생겼다고 하고, 그러면 그 업은 또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보면 무명(無明) 때문에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그 무명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물어보면 '홀연히' 생겨났다고 합니다. 즉 원래 완전한 불성(佛性) 자리에서 갑자기, 그리고 홀연히 모순과 잘못이 생겨났다는 논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설(佛說) 일체가 방편이라 하여도 이것은 중생들이 이해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한치도 잘못될 수 없는 완전함 속에서 불완전함이 나왔다'는 모순된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도를 닦아 불성자리를 찾아서 부처가 된다 하더라도, 언제 다시 '홀연히' 무명이 생겨날지 모르니 도는 닦으나 마나라는 논리가 됩니다. 그래서 이 가설(假說)은 그다지 훌륭한 이론이 아닙니다.
--- pp 59
견성만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 구경을 한 번 했다고 서울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서울에 살아야 비로소 서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깨달음이란 단순히 見性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진리와 합일하여 하나가 되는 合性이 되어야 합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