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기 마련이다. 곡해와 자만과 허세, 그것만큼 인간을 저속하고 추잡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 나이 정도에 이르면 그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모두가 깨닫는다. 이 글을 써가며 스스로 가장 경계했던 점이다. 걸어온 길을 겸허하게 성찰하려 했으며, 반성의 계기로 삼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단호하지 못해 빚어졌던 실수에 대한 아픈 반성의 기록이기도 하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그들에 비해 우리 동네의 처지는 꽤 어려웠다. 일본 만화나 그림책을 사서 읽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 그런 책을 빌려다가 권하면 친구들은 ‘쪽바리 책’이라고 펄쩍 뛰며 외면했다. 당시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지만, 나 역시 용돈이나 군것질은 물론 장난감 같은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 만화책에 흥미와 관심이 쏠려 일본 아이들로부터 그런 책들을 빌려 읽고 달콤한 재미에 흠뻑 빠지곤 했다. 그러나 일본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본 아버지는 그런 나를 두고 한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통영이 전부이던 시절」중에서
어머니는 책 읽기에 대해서는 별말이 없었다. 이때 사 모은 책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은 일본 개조사37의 ‘경제학전집’ 66권이었다. 뭔가 근사한 내용들이 담겨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만, 장차 경제학을 공부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헐값의 책들이 눈에 띄어 샀을 뿐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책들을 사 모았던 게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통영이 전부이던 시절」중에서
1953년 고향으로 낙향한 뒤 미친 듯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세계문화사》를 읽고 러시아 공산주의 발전과 선진 자본주의의 세계경제 지배를 알게 된 후 잠자는 시간마저 줄여가며 공부에 매달렸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타성에 젖어 학교를 오가다가 세상을 넓게 알고 삶을 혁신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정적 순간들」중에서
아까 내가 본 것이 정말 틀림없겠지? 그렇지?’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옆 제일은행 건물에 설치된 한국은행 임시영업부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대학 선배 박태주 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오, 오, 축하한다. 관보(官報)에서 봤다.”
“관보라니요?”
“중앙청에서 발표하는 정부의 공식발표문이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순간 온몸에 퍼져가는 전율을 느꼈다.
---「결정적 순간들」중에서
1966년 연말, 광주지방청장 3개월 만에 또다시 서울지방국세청 청장으로 발탁되는 이변을 겪었다. 처음으로 맞은 광주청장 생활에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서울로의 갑작스런 승진에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지사, 법원장, 검사장 등 광주 시내 기관장들은 3개월 전에 국장에서 청장으로 수직 승진을 한 것도 대단한 일인데, “불과 석 달 만에 또다시 서울로 영전하다니” 하고 야단법석들이었다.
---「결정적 순간들」중에서
대학교수가 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또 하나, 생업을 구상하기는 했다. 남몰래 일본으로 가거나 부산으로 내려가 식당에서 심부름, 청소부터 시작해 최소한 1년 이상 요리사 수업을 철저히 받은 후에 일본 요리사의 길로 뛰어들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장차 제2의 생업을 찾아야 한다면, 가장 자신 있는 직업은 생선을 다루는 조리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파도 없는 바다는 없다」중에서
길을 가다가 등 뒤에서 누가 ‘박사님, 교수님’ 하고 부르면 선뜻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국장님, 청장님’ 하고 부르면 쉽게 돌아보지 않는다. 관직을 떠난 지 벌써 40여 년이 지난 탓도 있지만, 국세청에서 일할 때보다 교수로서의 삶에서 더 큰 보람과 만족을 얻었기 때문이다.
---「파도 없는 바다는 없다」중에서
건물 이름은 고향을 생각하여 ‘통영빌딩’이라 지었다. 이름을 팔아야 할 정치인이 아니라서 재단에는 이름 대신 호를 내세우기로 했다. ‘풍해(豊海)’란 절친한 대학 친구 김일곤87 박사가 고향 바다 ‘한려수도’를 연상하고 이웃과 고향에 넉넉한 마음을 베풀라고 지어준 아호였다. 그래서 재단 이름은 ‘풍해문화재단’이 되었다.
---「절실하게 그러나 담대하게」중에서
초등학교 시절, 일본 정치 헌병과 고등계 형사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온 아버지는 나의 장래를 답답해하셨고, 살림을 꾸리느라 고생하신 어머니는 내 공부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 내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모교를 빛낸 졸업생 16명’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으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아보면 어머니의 남몰래 흘린 눈물과 기원이 없었다면 이날의 영광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절실하게 그러나 담대하게」중에서
그런 어느 날 같은 대학, 같은 경제학과에 다니는 고향 친구 집에서 그가 부산에서 샀다는 《최신 경제학 용어사전》을 발견했다. 시험 삼아 첫 페이지를 읽어본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첫 페이지 첫 용어부터 ‘케인스 이론’에서 나오는 최신 학술용어가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책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조그만 항구도시 통영의 서점에 그 책은 없었다. 별수 없이 친구에게 매달렸다. 사전을 간신히 빌린 1주일 동안, 모르는 학술용어를 노트에 옮겨쓰기 시작했다. 곁눈질할 겨를이 없었다.
그 사전을 통해 ‘케인스 이론’에 바탕을 두고 등장한 국민소득론, 공공경제학, 거시경제학, 투자승수론, 유효수용원리 등 낯선 전문용어들을 노트 다섯 권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구술시험 직전까지 그 노트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용어들을 계속해서 암기했다. 그 결과 그 노트는 구술시험을 마음 놓고 치를 용기를 주었다. 그 지식을 훗날 관계에 진출했을 때 상관에게 발탁될 유용한 최신 학문이었던 것이다.
---「책과 세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