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신물을 삼키며 어질어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누르는데, 무슨 불길한 조짐처럼 『말테의 수기』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도대체 나는 그곳에 살려고 가는 것일까, 죽으려고 가는 것일까.
--- p.13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 건데,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있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 거리나 관계나 마찬가지지만, 가까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멀리 있는 것도 있는 것이지. 더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부정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아버지야말로 그런 존재지. 죽기 전에는 없어질 수 없다는 뜻이야. 어떤 경우에는 죽어서도, 죽은 채로 있는 게 아버지지.”
--- pp.33~34
아버지의 비석을 보는 순간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순간 곧추섰다. 이상한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묘비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한데 이름은 읽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 묘비명에서 이름을 읽을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그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그는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이름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고 해야 할까.
--- pp.48~49
나는 외삼촌이 가르쳐준 아버지의 이름을 혀 위에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혀는 뻣뻣하게 굳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발음기관들이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그 이름이 불러일으킬, 불러일으킬 만한 이미지가 없는데도, 아니, 실은 없기 때문에 내 영혼은 쭈뼛거렸다. 스물아홉 해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긍정하고 인정해야 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 p.68
“세상에! 식당에 앉아 있는 놈들이 30년 전의 걔네 아버지들인 거야. 유전자가 참으로 무섭더라. 아무리 달아나려고 해도, 결국 자기 아버지처럼 늙어가는 거야. 자기 아버지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거야. 다른 재주가 없어. 놀랍고 우습고 서글프고 그러더라.”
--- pp.91~92
햇살이 그의 얼굴에 부서졌다. 눈이 부신지 얼굴을 약간 찡그린 그가 울타리 가까이 다가오더니, 타이밍이 좋지 않다, 하고 예사로운 톤으로 말했다. (……) 나는 매일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듯 편하고 자연스러운 그의 말투가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 문장은 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난해했다.
--- pp.147~148
아버지는 왜 나를 사랑하느냐, 혹은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것은 ‘사랑하다’가 아들에게 속한 동사가 아님을 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찾는 자, 찾도록 운명 지어진 자가 아들이다. 아들만이 바위산과 갈대숲과 선인장밭과 끓는 사막을 통과하며 찾는다…….
--- p.178
나는 말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테의 탕자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을 무한한 공중에 내던지는 것과 같은 느낌. 무한한 공중의 무한한 침묵에 휩싸인 가난한 몸. 그를 둘러싼 모든 풍요를 도리어 끔찍한 것으로 바꿔버리는 단 하나의 결핍.
--- p.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