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동물과 인간의 사랑을 지향한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을 오해하지 말기로 하자. 여기서 사랑은 서로에 대한 동일시나 열정, 낭만화와는 거리가 멀다. 한때 귀여운 강아지를 사랑했던 사람이 그 강아지를 유기하기도 한다. 이 사람은 귀여운 강아지를 사랑한 것이지 강아지라는 구체적 동물을 사랑한 것은 아니다. 또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취향이나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또한 사랑은 인간인 나와 대상인 동물을 동일시하는 감정 상태가 아니다. 동일시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됨의 관계를 말한다. 하나됨은 대상을 이상화하거나 낭만화하기 쉽기 때문에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자주 파괴하곤 한다. 하나됨에 빠지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사랑일 때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랑이란 동물 타자에 대한 지속적인 긍정의 관계를 말한다. 사랑하는 동물이 인간종과 다른 타자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 타자에 대한 앎을 필요로 한다. 타자에 대한 앎은 나의 편협할 수 있는 자아를 찢으며 나의 정체성을 확장하거나 바꾼다. 그렇게 동물과 인간은 서로를 현실적으로 긍정하면서 둘이 함께하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는 동물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
---「들어가며」중에서
닭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서열을 이루는데, 서로를 쪼는 방식으로 싸워 서열을 결정한다. 닭 무리가 90마리에 이르러도 안정된 서열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는 닭이 자신의 서열을 알고 있으며 무리 구성원을 개별적으로 식별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공장식 농장에서 닭의 부리는 잘리고 만다. 나쁜 환경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로 유발되는 공격 행위를 줄이기 위해서이다. 부리를 자르는 행위는 닭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힌다. 부리를 자르는 뜨거운 칼날 때문에 입 안에 물집이 생기고 아래턱이 부풀어 오르기도 하는데, 닿기만 해도 통증이 무척 심하다. 부리 자르기로 인해 닭들은 육체적·사회적 고통을 겪는다. 각자의 닭장에 갇혀 있으니 사회적 관계도 맺을 수 없다. 싱어는 묻는다.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닭이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적절한가? 인간이 육식을 한다는 것은 옳은 일인가?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동물해방론」중에서
동물과 인간은 거리가 멀건 가깝건 간에 공동의 역사를 만들고 지구적 공동 문화를 구축해왔으며, 동시에 각자의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을 구가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고양이 요다와 함께 우리 집을 만들고 있다. 고양이에게 자유를 원하느냐고 묻는 것은 올바른 질문법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에게 묻는 것에 가깝다. 실패와 성공이 오가는 소통을 통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의존하면서도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얽힌 역사를 기억하며, 동물 아기가 아닌 동물 그 자체로 존중하고, 고통의 경감이 아니라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에서 동물과 인간은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동물은 감염시키고 빵을 나누는 소중한 타자다-동물관계론」중에서
동물 문제는 동물이라는 존재 자체보다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탐색될 수 있다. 가령 에콰도르 아마존강 상류 유역의 루나족runa은 재규어와 가깝게 살고 있는데, 이 부족에는 숲에서 엎드려 자지 말라는 말이 있다. 재규어는 엎드려 자는 인간을 ‘그것’, ‘먹잇감’, ‘죽은 고기’로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루나족의 금언은 재규어를 인간을 마주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비인간 동물의 존재를 능동적으로 인정한다. 언제나 재규어와 맞닥뜨릴 수 있는 숲에서 살아가는 루나족은 자신을 ‘루나 푸마runa puma’로 보기도 한다. 루나 푸마란 ‘재규어-인간’, 즉 재규어로 변신할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루나 푸마는 인간이면서도 포식자다. 재규어에게도 인간처럼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위치는 달라진다. 재규어가 누구인지, 그리고 인간은 누구인지에 대한 답변은 재규어와 인간이 특정한 관계 속에 있을 때 내놓을 수 있다. 동물과 인간이 관계를 잘 맺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앎이다. 그 앎이 관계를 두껍고 촘촘하게 한다.
---「쥐의 특이한 위치」중에서
동물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복잡하고 중요한 이슈와 결합된다. 동물에 대한 질문은 인간의 고유성, 인간의 특권, 인간의 본질, 인간의 윤리·정치·법에 새로운 의미를 기입하고, 경계를 재조정하는 과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물적인 것을 사유할 때 인간의 특권과 고유성은 재기입될 수 있고, 동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를 사유할 때 정치와 법의 영역은 확장된다. 21세기가 제기하는 동물의 의미는 인간의 영역을 해체하고 재구축한다. 우리는 동물이란 누구인가를 묻기 전에 인간과 동물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동물이 타자라는 점에서 우리는 동물을 완전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없으며, 그들의 정체성 역시 선험적으로 말할 수 없다. 동물은 관계성 속에서 보다 자신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와 동물은 어떤 시선의 관계 속에 있을까?
---「동물의 시선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시선의 얽힘」중에서
그것은 동물을 열렬하게 사랑하자는 얘기와 조금 다른 말이다. 인간의 윤리적 공감력을 높이자는 뜻도 아니다. 사랑과 공감이 오히려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고,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인간중심주의에 무게를 둘 수 있는 위험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나와 동물 사이의 다양한 관계의 선들을 파악하는 일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물의 삶과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한다. 우리는 인간성의 개념을 다시 설정할 때가 되었다. 동물을 배려하고 잘 관리하는 것은 휴머니티가 아니다. 인간은 가이아에서 동물과 연결된 생명체이자 그들과 신경 체계가 조금 다른 존재일 뿐이다. 동물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고 함께 살고 죽어갈 것인가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인간이 아니겠는가.
---「동물은 우리를 (새로운)인간으로 만든다: 언어 없이 대화하기, 주의를 기울이기」중에서
하지만 공생은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세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동물과의 공생 관계를 복잡하게 사유하고, 복잡성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 자체가 다규모적·다층적이며 얽혀 있기 때문이다. 공생은 존재론적으로 평평한 관계를 인정할 수 있지만, 상황적으로는 차이와 불평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동물과 함께-되기를 실천할 때 차이와 불평등을 탈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종차별적이기도 하지만, 성차별, 인종차별, 언어차별 등 다양한 차별을 안고 있다. 여성은 오랫동안 ‘자연’이나 ‘동물’로 비유되어왔다. 아기를 낳아 기르는 여성과 비좁은 스톨에 갇혀 새끼를 분만하고 젖을 먹이는 어미 돼지는 종을 가로지르는 교차적 지점에 있다. 여기에는 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되어 차별을 증폭시킨다. 동물에 대한 종차별이 동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간의 불평등과 교차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동물과 함께 잘 산다는 것은 인간과도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나가며 환대에서 공생으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