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빈둥이란 말에 부정의 멍에 대신 긍정의 왕관을 씌워 줘야 한다. 이제 이 말은 무엇을 꼭 해야 하는 당위와 책임과 의무의 세계로부터의 해방, 내 시간과 생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감성과 상상력의 원천, 무위와 성찰을 뜻하는 말로 격상되어야 한다. --- p.45
기대와 환상과 계획에서 어긋날 때 비로소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기대를 채우겠다는 마음을 버릴 때 기대하지 않았던 다른 것이 나를 채워 준다는 걸 알았다. 이제야 나는 욕심 부리지 않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한 단계 수준 높은 여행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쿠바 여행이 나에게 가져다준 가장 의외의 수확이다. --- p.60
혹시 핸드백 속에서 영화 [토이 스토리] 같은 세계가 펼쳐지는 게 아닐까. 내가 가방을 닫는 순간 가방 속 물건들이 살아나서 저희끼리 운동회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쫓고 쫓기고. 립스틱과 아이펜슬은 “모자 벗고 한판 싸우자”며 박치기를 하다 저렇게 상처를 달고 사는 싸움꾼이 되었고, 볼펜은 한 대 맞고 매일 검은 눈물을 흘려 대는 울보고, 귀걸이 한 짝은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탈출에 성공하고 한 짝은 굼떠 남겨지고. --- p.62~63
기억력: 나이 들어 가물가물해지는 그것을 잘 지켜 보겠다며 수첩에 메모를 열심히 하지만 수첩을 어디 뒀는지 몰라 당황하게 하고, 그것이 더 나빠지지 않으려면 테트리스 같은 게임을 해야 한다기에 열심히 게임 삼매경에 빠지다 보면 정작 해야 할 일을 까먹게 되며, 두뇌에 좋다는 견과류를 열심히 먹다 보면 새록새록 맥주 생각이 들어 음주량만 늘어나게 되는, 정말 이 나이엔 지키기 힘들어지는 것. --- p.66
나잇값: ‘마흔이 넘으면 긴 생머리는 절대 안 된다’ ‘청바지도 안 된다’ 같은, 주부 커뮤니티의 규율을 지키며 살아왔으나, 정작 나이가 들자 ‘꼭 그럴 필요 있어?’라며 거부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 그러고 보니 젊었을 땐 늙은 마음으로, 늙어선 다시 철없어진 마음으로 사는 자세 때문에 아마도 영원히 제대로 한번 해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 --- p.71
팬으로 살아온 인생에 뭐가 남았냐고 물어 온다면 사실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내 안의 열정과 환희를 일깨워 준 것은 팬심이라고, 그것이 내 젊은 시절의 전부이자 마음속 공허함이 쏟아져 내리지 않게 해 준 든든한 댐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헛헛하고 고달픈 삶을 느끼는 사람에게,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의 ‘팬’이 되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 p.112
천 번보다 훨씬 더 흔들렸는데도 아직 철이 안 드는 내 삶을 보면 아예 어른이 되길 포기해야 그나마 천진난만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까딱하면 거짓말이 되기 쉬운, 그게 아니면 믿기 싫은 말들을 내 자식과 자식 세대들에게 덜하며 살고 싶은 게 거짓 없는 솔직한 마음이다. --- p.135
만약 내가 비유의 매뉴얼을 만든다면 겪어 보지 않은 일은 쉽게 비유로 쓰지 말도록 할 것 같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 담긴 비유가 좋은 것이라고 강조해야겠다. 예를 들어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 앞에서 “한숨도 못 잤어”라고 하거나 자식을 잃은 부모 앞에서 쉽게 ‘애끊는’이란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 p.148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풍경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기껏 전화를 받지 않아 봐야, 카톡을 읽지 않아 봐야,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막강 권력 스마트폰의 노예일 뿐이다. --- p.210
“나는 잘 모릅니다.” 부끄럽고 비겁하긴 하지만 이 말을 더 하면서 살고 싶어졌다. 물론 확신을 혐오하지는 않을 것이다. 확신이 덜 필요한 일을 찾겠지만 확신을 가지지 않고는 살 수 없을 테니. 그래도 ‘나는 잘 모른다’는 말을 방패로 삼아야 그 뒤에서 조금씩 나는 확신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p.217
편두통 덕을 본 게 있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에 좀 더 공감하게 됐다는 점이다. 편두통은 특별한 증상도 없고 한번 지나가면 너무나 멀쩡해져 남들에게는 딱 꾀병처럼 보이기 쉽다.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나만의 고통인 셈이다. 그 덕분에 나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이렇게 평생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헤아리게 되었다. --- p.265
위대한 소설가들이 눈이나 콧수염이 움찔거리는 모습은 묘사할지언정 그것들의 모양으로 사람들을 유형화해 캐릭터를 만들어 내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많은 공통점이 있더라도 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만의 우주를 내 몸속에 간직한, 너와 아무리 비슷해도 같아질 수 없는 나일 뿐이다.
--- p.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