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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 청어 | 2022년 11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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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04쪽 | 180g | 130*205*20mm
ISBN13 9791168550926
ISBN10 1168550920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이제, 빈 들길을, 비어 있어 억새꽃 더욱 우수수 일어서는 들길을 구름을 밟듯 걸어 볼란다. 먼 기억의 저편에 사름사름 사려 두었던 처음 그 자리에 다시 와 해 질 녘 드문드문 귀가를 서두르는 농부들 발소리 산그리메로 오는 길, 쫓기듯이 발등 적시며 질러 왔던 길, 그래서 늘 에돌기만 하던 그 길도 다시 걸어 볼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른 풀들이 서걱이는 이야기도 들어 볼란다. 마디풀, 지칭개, 꽃마리, 미처 제 배내 이름도 불러 주기 전에 발길에 밟혀 잊혀진 잡초들이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며, 방아깨비 한 마리 질경이 한 포기도 그냥 왔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며 제 그늘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사연들도 들어 볼란다.

연잎에 소낙비 쏟아지듯 서둘러 왔던 그 길, 모가지가 꺾여 제 속에 이는 바람에도 만가를 풀어내는 수숫대 발아래 숨어 사위어가는 목숨에 입 맞추는 풀벌레, 그리고 시린 이파리 그 이름 앞에 연초록, 갈맷빛, 샛노랑 이런 예쁜 낱말 하나씩 붙여도 보고.

여울물이 제 살갗 부비는 강 머리에서 아슴한 내음이 켜켜이 전설로 쌓인 할매의 웅숭깊은 눈 속에 흐르다가 고이고 고였다가 흐르는 강물의 내력도 처음 그 자리에 다시 와 들어 볼란다.
---「여는 시 : 처음 그 자리에 다시 와서」중에서

병풍 속
쪽배 위에
빈 낚시 드리우고

능라에 수놓은 꽃
하마 열매 바랐을까

바다로 가던 물굽이
일부러 산을 넘는구나
---「무제 1」중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켜 놓고
주렁주렁 드리운 주렴 사이로
주방장이 국수를 뽑는 모양을 본다

양손으로 밀가루를 뭉쳐 떡판을 칠 때마다
밀가루 반죽이 손가락 사이로
수많은 가닥으로 갈라지는 면발
나도 따라 걱정이 천 갈래 만 갈래다

사념이 갈라지는 어지러운 심사로
저러다 타래가 헝클어져
끝내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는 걱정 틈을 비집고
국수발 가지런한 그릇이 내 앞에 놓인다
그제야 생각들도 제자리를 잡는다

어지러운 세상사 모래를 살살 뿌려가며
사름사름 실마리를 사려 담던
어머니의 아득한 삼실 소쿠리처럼
---「실마리」중에서

누군들 살아오면서 한두 군데 흠이 없으랴
남모르게 찌그러지고 우그러진 데 없으랴

사차선 대로변 늙은 벚나무 가로수 아래
딴에는 노상 불법 주차에 주눅이 든
보기에도 후줄근한 낡은 봉고차
좌석을 들어내고 뒷문을 열어젖힌
이동 카센터의 잡동사니 가득한 경력과
옆구리에 ‘찌그러진 데 펴드립니다’며
겸연쩍게 내 건, 때 절은 플래카드 글귀에
들내기 싫은 제 이력이 꼬깃꼬깃 숨어있다
이런저런 교통위반에 숨 바쁜 순찰차도
찌그러진 데 펴준다는 그 말에 빙긋 웃고
경고 삼아 사이렌만 삑 울리고 지나간다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져 본 사람이라야
본래대로 바로 펴는 순서를 안다는 듯
비틀어지고 쪼그라든 마음까지 헤아려서
오늘도 남의 상처를 팽팽하게 다림질한다
제살처럼 당기고 펴서 반질반질 윤을 낸다.
---「찌그러진 데 펴드립니다」중에서

잔박구러기 키울 때는
일곱째라 젤로 거석 했는데

시집 보내농께
병든 시어마시 봉양 잘하고
새끼들 잘 키우고

서방 물어다 주는 거 갖고
살림 야물게 불리고
인자는 떡! 벌어졌다

가까이 있응께
쉬는 날 거석도 자주 시키고
이 거석 입히고
저 거석 입에 넣어 주고

바리데기도 아닌 것이
시방으로 봐서는
내게 긔중 거석 하니라
---「일곱째」중에서

할매와 손녀가 물걸레로 장독을 닦고 있다. 네 살배기 아이도 할매 따라 소매 걷고 거든다. 딴에는 제 키보다 낮은 항아리를 골라 닦는다. 물걸레가 지나간 자리 까만 햇빛 방글방글 새첩다. 새뜻한 듯 바라보는 아이 눈망울 반짝반짝 새첩다. 오목한 보조개에 고인 웃음 생글생글 새첩다. 통통한 손끝에 듣는 물방울 방울방울 새첩다. 뽀송한 이마에 맺힌 땀방울 송글송글 새첩다. 갈래머리에 내려앉은 가을볕 반들반들 새첩다. 상강머리 감이파리도 발그라니 새첩고 그러고 보니 새첩다는 말도 너무너무 새첩다.
---「새첩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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