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왕을 내어주소서.”
먼 옛날 포악하고 어리석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니 하늘마저 메말랐다.
오래도록 가뭄이 들자, 숨이 붙어 있는 것은 모두 살아남고자 변화해 간다.
왕위를 빼앗긴 왕자는 궁을 떠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고달픈 백성의 염원은 하늘에 가닿을까…
SF소설 원작의 국내 첫 그림책
올해 3월 에디토리얼 출판사는 김보영 작가의 단편소설 「진화 신화」를 동명의 단편집에서 독립시켜 일러스트레이션을 곁들인 단행본으로 개정 출간했습니다. 그후 약 8개월 만에 ‘그림책 진화 신화’를 완결해 『신령한 것이 나오시니: 그림책 진화 신화』라는 제목으로 내놓습니다. SF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그림책으로는 국내 첫 시도입니다.
지금은 개정되어 새로이 출간된 김보영 작가의 중단편집 두 권은 작가 개인에게도 한국 SF계에도 매우 귀한 책입니다. 그 소설들 중에서 그림책이 될 만한 이야기를 만나리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진화 신화』를 판타지 SF라는 크로스오버로 만들어주는 세계관을 가리고 보면, 옛이야기(신화, 설화, 우화 등)의 서사 구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데기’ 신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들이 아니라서 출생 후 버려졌던 바리데기가 죽을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난다. 바리데기는 세 번의 고된 시련을 겪으며 저승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생명수를 구해 돌아와 아버지를 살려낸다’. 『진화 신화』의 서사도 시련에 처한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 속도감 있게 전개됩니다. 한편으로는 『진화 신화』가 옛이야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대개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시련을 거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어떤 능력(바리데기에겐 세 가지 꽃)을 가지고 자신이 속했던 세계로 돌아가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일을 떠맡습니다. 한데, 『진화 신화』의 주인공 왕자에게는 그러한 목적을 향한 의지가 없습니다. 이는 『진화 신화』가 우리 옛 고사들을 차용하면서도 진화론과 동양의 ‘자연’ 관념을 끌어들여 창조한 세계관에서 기인하는 독창성입니다. ‘그림책 진화 신화’는 원작 고유의 세계관을 보존하면서 옛이야기의 서사 전개 방식을 활용해 원작을 각색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생물이 급격하게 진화하는 판타지 세계”를 그림으로 펼치다
김홍림 작가는 2월에 단행본 『진화 신화』의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마무리하고 곧장 그림책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원작의 환상성을 자신의 스타일로 구현하는 데 가장 공을 들였습니다. 김홍림 작가의 장기는 구성력, 맑고 신비로운 색채 감각, 말을 걸어오는 듯 느껴지는 그림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고구려 역사의 한 토막과 연결되어 고증이 필요하면서도, ‘역진화’ 이야기의 기이한 상상력을 무리없이 엮어내야 했습니다.
김홍림 작가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무대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는 건축학을 전공하고 업계에서 일한 이력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입니다. 삼국사기의 신화적 기록으로부터 탄생한 변신 이야기는 서른다섯 개의 막으로 구성된 무대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가뭄이 들어 메말라버린 고구려 왕국의 쩍쩍 갈라진 대지를 지나 컴컴한 밤의 어둠 속에 고양이처럼 눈동자를 밝히고 앉은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하나의 작은 액자 이야기로서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고편이자 원작의 세계관을 멋지게 함축합니다.
책가도를 몬드리안 스타일로 응용한 앞의 ‘세계관’ 장면처럼 기하학적 조형을 의도한 장면이 꽤 있습니다. 현실 공간 안에 초현실적 감각을 교차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왕자가 목숨을 구하려 궁궐을 떠나 자연 속으로 발을 들이면서부터는 판타지 세계로 성큼 들어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왕자는 허물을 벗으며 변신을 거듭하는데, 이때부터 주연은 도리어 조연처럼 그려집니다(그려져야 합니다). 변화하는 중인 그의 모습을 당분간은 고정시킬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클라이맥스까지 비밀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진화는 시간과 짝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김홍림 작가는 원작에서 시간 요소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림책이 원작보다 빠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기에 그는 시간 표현에도 마음을 썼습니다. 큰 판형으로 물리적인 공간을 확보해 눈길이 화면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천체의 운행만으로 표현되는 장면들을 두어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합니다.
창작 그림책 작업의 어려움과 기쁨
김보영 작가가 직접 원작을 각색했습니다.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여러 번 출간된 작품”으로 국내외 지명도가 있기에 그의 문체를 그림책 독자분들도 즐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김보영 작가는 그림책 작업이 처음인데도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의 호응과 긴장 관계를 숙지하고 마지막까지 글을 다듬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림 작업이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그림작가의 시간이 펼쳐지고 그의 어깨는 무거워집니다. 김홍림 작가는 글작가, 디자이너, 편집자의 ‘말’들을 소화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글작가, 디자이너, 편집자는 이 그림책에서 꼭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공통된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왕자가 ‘역진화’하며 기괴하게 변신해 가는 과정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드러나야 하는데, 독자가 클라이맥스 장면에 도달하기 전까지 변신의 최종 모습을 짐작할 수 없도록 그려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구성 전략이 중요했다는 뜻인데, 김홍림 작가는 대단한 집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왕자는 궁궐을 떠나기 전에 야행 습성으로 인해 노란 눈과 푸르스름한 피부의 돌연변이 표현형을 획득한 상태입니다. 궁에서 도망친 후 왕자가 온전한 전신을 드러내는 장면은 없고요. 결말부에 이르러 구름과 비를 휘감아 비상하며 창공으로 상승하는 통쾌한 장면은 작가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해 독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게 합니다.